이제 그만 웃을 때도 됐는데. 자꾸 웃으면 자존심 상하는데... '당돌한 얼음' 짤은 처음 본 이후부터 지금까지 내 웃음 지뢰가 되어 버렸다. 내가 웃기면 웃겼지 그렇게 쉽게 웃어주고 하는 사람이 아닌데, 아무래도 개그감이 훅 떨어진 게 분명하다. 한번 웃고 말아도 될 것을 볼 때마다 콧구멍이 벌름거리니 이거 참.
나이가 드니 웃을 일이 별로 없다. 당장 먹고 살 생계 걱정에 서서히 웃음이 사라지고, 웃지 않으니 남아있던 개그감마저 모두 잃어 지금은 소멸 직전에 이르렀다. 내가 어떻게 개그감을 잃어버릴 수 있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이 상황이 어이없어서 한참을 생각해본다. 너무하다. 나한테 자랑스러운 건 개그감 하나뿐이었는데. 남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게 딱 그거 하나였는데 이제 그것마저 없어지다니.
저녁마다 걷기 운동을 하고 있다. 사라지라는 지방은 왜 이리도 질기게 들러붙어 있는지 운동하기가 너무 싫어 매번 나 자신과의 격투 끝에야 겨우 운동장에 도달한다. 어제도 울며 겨자 먹기로 나와서 무거운 발을 질질 끌며 걷고 있는데 내 앞에서 걷던 할아버지가 방귀를 뿍- 뀌는 거다. 짜증이 확 나서 우악! 소리를 질렀다. 자기도 놀랐는지 만화처럼 발이 안 보이게 걷네. 사라지는 뒤통수를 노려보며 손을 휘휘 저었다. 생각 같아서는 쫓아다니며 '다른 사람 얼굴에 뀌면 시원하세요? 시원하세요?' 묻고 싶은 맘을 억지로 참았다.
어릴 땐 모르는 사람 방귀소리도 개그로 써먹으며 미친 듯이 웃어대기도 했는데 지금은 웃기지 않는다. 개그는 커녕 나는 늙으면 저러지 말아야지 같은 마음으로 방귀 뀐 사람을 노려보게 된다. 넘쳐나던 여유와 웃음은 다 어디로 갔을까? 친구들과 방귀 한번 트림 한 번에 하루 종일 웃고 떠들던 순간들이 20대까지만 해도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제 더는 내 방귀에도 남의 방귀에도 웃지 않는다. 나이가 드니 웃음은 휘발되고 냄새라는 본질만 느껴진다.
생각해보면 웃음은 본질을 가리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나는 그 수단을 위한 재료로서의 개그감을 많이 지니고 있었지만 이제는 똑 떨어졌다. 피곤한 직장생활에서, 존재의 불안에서, 실패의 고통에서, 무능력한 자신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무의식 중에 개그의 감을 키웠던 것 같다. 하하하하. 웃음으로 모든 상처를 가린다. 너무 쉽잖아? 하하하하 웃으면 끝나는 거야. 부드러운 담요를 펼치듯 나는 개그를 펼치고 웃음으로 슬쩍 덮고 다독이며 본질을 감췄던 것이다.
어릴 땐 참새 시리즈를 읊어대고 맹구 흉내를 내며 울고 있는 친구들을 웃겼다. 나의 개그에 기분이 풀리는 타인들을 보며 뿌듯했다. 싸우고 있는 친구들 사이에 맹구 흉내를 내며 끼어들어 입을 몇 번 털어주면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친구들은 내 개그를 좋아했고 나는 배꼽잡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며 이상한 안도감에 뿌듯함을 느꼈다. 특히나 나를 보며 웃을 때마다 눈물과 콧물을 동시에 흘리는 소중한 친구가 있다. K의 주머니와 가방엔 그래서 항상 휴지가 넉넉히 들어 있다. K는 10대 때부터 줄곧 나에게 개그맨 시험을 보라고 다그쳤다. 그럴 생각이 별로 없던 난 말한다. "너 웃을 때 콧물 흘리는 걸 개그로 써도 될까?" 그러면 K는 화들짝 놀란다. "안 되면 안 할래. 너 코 흘리게 하는 것만으로 난 됐어."
어느 날, 친구 A가 편지로 인연을 이어오던 남자애와 서로 친구들을 데리고 같이 놀기로 했다며 우리에게 예쁘게 입고 오라고 했다. 우리에 대해 말하자면 첫눈에 보이는 우리 네 명의 모습은.... 얼굴이 크고, 덩치가 좋고, 키가 작고, 통통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장점은 이러하다. A는 배려심이 많고, B는 노래를 잘하고, C는 영리하고, 나는 웃기다. 그러므로 괜찮다. 이 정도면 됐다. 개그감이 있다는 건 여러 면에서 유리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남자건 여자건 나를 친근하게 생각하고, 모두가 나에게 마음을 터 놓는다. 타인들은 재밌는 사람에게 유독 너그럽다. 개그맨들이 미녀들과 결혼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이번 만남에서 내 필살의 개그로 기필코 한 놈 꼬신다.
절친 K에게 흥분하여 이 사실을 전했더니 K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근데, 너희들 못생겼는데 어떻게?”
어휴, 이 편견 없는 인간. 친구 건 뭐 건, 진실을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K. K는 정말로 궁금해서 눈을 말똥말똥 뜨고 묻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렇지? 좋아, 그럼 이렇게 된 이상 귀여움으로 승부한다.”
“아니, 못생겼는데 어떻게 귀여워?”
“못생겼다고 대놓고 말할 순 없을 테니 귀엽다고 하는 거야. 저 여기 있거든요? 예의 좀요.”
“알았어. 미안해.”
“오케? 그럼 나는 이제부터 귀여운 거야. 그거 알지? 예쁘다, 귀엽다는 말이 차마 안 나오는 못생긴 아가들 보고 우리가 하는 말 있잖아. ‘아유, 아가네~’ 그거랑 같은 맥락이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먼 옛날에도 영화 같은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마음을 굳게 먹고 개그를 잔뜩 장전하고 나갔지만 우리는 우리만의 장점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빌어먹을, 눈에 보이는 것만 처 주는 더러운 세상. 남자애들은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멀리서 우리를 훔쳐 보고 도망간 게 분명했다. 아 안 돼. 개그는 커녕 귀여움으로 승부조차 걸지 못했어. 이건 진짜 안 되는 거야. 그날 A, B, C, D는 얼굴도 모르는 놈들만 잘근잘근 씹어대다 집으로 향했다. A에게 편지를 보내던 녀석의 연락도 그날 이후로 끊겼다고 한다.
개그감 얘기를 하다가 나는 왜 슬픈 과거사를 말하고 있는가... 어쨌거나 개그감에 대해 주절거리고 있자니 슬금슬금 몸속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것만 같다. 존 버거는 <말하기의 다른 방법>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진가가 자기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대상을 사진에 담지 않고 어떻게 거기서 자유로워질 수 있단 말인가?’라고. 어딘가에 찔끔 남아있을 수도 있는 개그의 불씨를 찾아 나서 말어? 살아남기 위해 개그를 무기로 쥐고 버텨 낸 나 아니던가. 존 버거의 말에 자꾸 귀가 가렵지만 안타깝게도 내 개그감은 오래전에 잃어버려 이미 회생불가다.
근데 말이지 내가 누군가를 웃기고 싶어 했던 건, 혼자이기 싫어서였던 건 아닐까? 나는 타인을 귀찮아하고 불편해하지만 때때로 타인들이 뭘 하는지 궁금해 목을 빼꼼 내민 채 바라보곤 했다. 드넓은 지구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하는 사람처럼, 나는 타인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혼자로 돌아갔다. 그럼 그것은 혼자이길 좋아하는 건가? 사람을 좋아하는 건가? 생각해보니 헷갈린다.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
위안이 있다, 타인의
음악에서만, 타인의 시에서만.
타인들에게만 구원이 있다
고독이 아편처럼 달콤하다 해도,
타인들은 지옥이 아니다,
꿈으로 깨끗이 씻긴 아침
그들의 이마를 바라보면.
나는 왜 어떤 단어를 쓸지 고민하는 것일까,
너라고 할지, 그라고 할지,
모든 그는 어떤 너의 배신자일 뿐인데, 그러나 그 대신
서늘한 대화가 충실히 기다리고 있는 건
타인의 시에서 뿐이다.
-<타인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아담 자가예프스키-
친구들은 나에게 말했다. 넌 웃기니까 나중에 개그맨 시험 꼭 보라고. 친한 친구들은 나에게 말했다. 넌 우울한 것 같은데 이상하게 웃기다고. 친구들과 함께 웃고 있는 순간만큼은 편안하고 즐거웠지만 돌아서 혼자가 되면 깊은 수렁에 빠진 것 같았다. 그러니 친구의 말도, 친한 친구의 말도 모두 다 맞는 말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타인을 싫어하지만 타인들로부터 위안을 얻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인간은 혼자서는 구원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혼자라면 개그감은 써먹을 데가 없다. 혼자 웃는 웃음소리는 공허하다. 타인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고독이 아편처럼 달콤하다 해도, 타인들에게만 구원이 있다.
개그감_ 2022년 완전히 소멸됨
30대가 되면서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하여 현재는 찾을 수 없음
목록_
01. 프롤로그_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방식
02. 서점_ 주인 모르게 홀로 팔아버린 책들
03. 리본_ 범인을 잡기 위해 놓은 덫에 걸린 나
04. 브래지어_ 입었을까 안 입었을까?
05. 미미_ 진짜는 무엇이고 가짜는 무엇인가
06. S_ 자기 나름의 이해란 곧 오해의 발판이다
07. M_ 나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어
08. 아빠_ 간신히 되찾았으나 기어코 잃어버렸다
09. 분노_ 감정의 잔해더미에서 살아남기
10. 개그감_ 나이가 들면 웃을 일도 사라지고
11. 머리숱_ 자연스럽다기엔 좀 억울하다
12. 에필로그_ 잃어버려서 잊어버린 걸까, 잊어버려서 잃어버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