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타인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숨 막히는 어색함. 서로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뻘쭘해지는 순간! 이 몹쓸 순간에 나는 어색하지 않을 나만의 방법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상대방이 최근에 무슨 실수를 했을까, 혹은 무엇을 잃어버렸을까를 그 사람의 말투나 행동으로 혼자 짐작해보는 것이다. 저 사람은 최근에 무엇을 잃어버리고 허둥댔을까, 놀랐을까, 혹은 잃어버린 뒤 후련했을까, 속상했을까를 생각해본다.
당장 나가야 하는데 양말 한 짝을 찾지 못해 한쪽만 신은 채로 온 집안을 뒤집는다거나, 분명히 지난주에 잔뜩 산 머리끈이 한 개도 보이지 않아 모든 가방과 주머니를 뒤지거나, 지갑을 잃어버리고 망연자실 달리는 버스를 바라본다거나, 홧김에 집어던진 커플링이 어딘가로 사라져 절망한다거나 하는 일들. 물론 다 내 얘기다. 하지만 당신의 이야기도 이와 많이 다르진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혼자 그런 생각들을 하면 슬쩍 웃음이 나고 상대방에게 훅, 정이 간다. 직전의 어색함은 사라지고 나는 그에게 한발 다가가게 된다. 다독여주고 싶고 애틋해지며 무슨 말을 하더라도 맞장구 쳐주고 싶어 진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처럼 냉철해 보이는 첫인상의 상대방이 실은, 실수를 연발하는 나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다. 그런 나를 보는 상대방 또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보이게 되고 우리의 대화는 어렵지 않게 흘러간다.
우리가 모르는 사람을 처음 소개받을 때 그 사람의 학벌이나 지위 재산정도 따위보다도 그 사람의 귀여운 버릇이나 소탈한 일화 같은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을 이해하고 호감 갖는데 믿을 만한 구실을 할 때가 있다.
-<잃어버린 여행가방> 박완서 -
작가의 글을 보니 나와 조금쯤 비슷한 생각을 가진 듯 해 반갑다. 타인의 버릇이나 소탈한 일화로 그 사람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는 말이 어쩐지 마음에 든다.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딱히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내가 처음 보는 타인에게 호감을 느끼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언제일까를 한번 생각해본다. 음... 믿음이 가는 목소리, 예의 바른 행동, 따듯한 미소 정도가 떠오르지만 이것들은 가식적인 부분일 수 있다. 누구라도 의식적으로 꾸며내고 거짓으로 만들어 보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정제되지 않은 채 문득문득 튀어나오는 버릇이나 허둥대는 본모습은 속일 수 없겠지. 어떻게 보면 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는 그리 대단한 배경이 필요치 않을 수도 있겠다. 반듯하게 잘 보이도록 내놓은 부분보다 다른 작은 것들이 진짜 본모습을 보여 주는 부분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작가가 말한 소탈한 일화나 버릇 말고도 내가 무엇을 잃어버리고 어떻게 대처했는가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적어도 예기치 못한 자신의 매력을 발견한다거나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는 첫걸음은 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무엇을 잃어버리고 여기까지 걸어온 건지 찾아보는 재미, 앞으로는 무엇을 잃지 않고 가야 할까를 알아가는 의미랄까?
근데 말이지. 내가 잃어버린 것들은 그것들을 내 머릿속에서 잊어버렸기 때문에 잃어버린 건지, 아니면 먼저 잃어버리고 나서 그것들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게 된 건지 모르겠다. 반반인가? 생각해보면 그런 것도 같다. 때때로 잊어버린 것과 잃어버린 것을 혼동하여 말할 때도 있고, 진짜로 뒤죽박죽 물건을 어디에 뒀는지 잊어버렸다가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고, 또 잃어버렸던 무언가가 우리의 기억에서 영원히 잊혀지기도 하니까.
닐 게이먼과 테리 프래쳇의 끝내주는 책 <멋진 징조들>에서는 주인공 중 하나인 악마가 장차 아마겟돈을 가져올 사탄의 아들 마왕을 인간의 아이와 바꿔치기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따르다가 아기 마왕을 잃어버리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악마가 일을 해결하기 위해 엉뚱한 짓을 벌이거나 악마답지 못한 생각이나 행동을 할 때면 아이참, 이거 자존심 상하게 악마에게 불쑥 호감이 간다. 그 별것 아닌 작고 허술한 면들로도 무려 '악마'를 호감형으로 바꾸는데, 까짓 우리의 허술한 면들은 또 얼마나 매력적일 것인가. 무엇을 잃어버리고 그로 인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고 우리는 그곳에서 무엇을 얻게 될지를 생각하면 얘기가 점점 흥미로워진다.
뭐, 어쨌거나 이것은 그렇다. 잃어버린 나를 마주한다느니, 잃어버린 꿈을 더듬어 본다느니 졸음이 쏟아지는 이야기를 기대했다면 미안하다. 나는 잃어버린 시간이나 잃어버린 희망, 꿈같은 지루한 얘기는 할 생각이 없다. 그런 글을 쓰다가는 내가 먼저 잠들 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가 진짜 어머, 깜짝이야,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쓴 글이고,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제, 지난주에, 한 달 전에 당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어머, 깜짝이야, 생각해 보길 바랄 뿐이다.
목록_
01. 프롤로그_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방식
02. 서점_ 주인 모르게 홀로 팔아버린 책들
03. 리본_ 범인을 잡기 위해 놓은 덫에 걸린 나
04. 브래지어_ 입었을까 안 입었을까?
05. 미미_ 진짜는 무엇이고 가짜는 무엇인가
06. S_ 자기 나름의 이해란 곧 오해의 발판이다
07. M_ 나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어
08. 아빠_ 간신히 되찾았으나 기어코 잃어버렸다.
09. 분노_ 감정의 잔해더미에서 살아남기
10. 개그감_ 나이가 들면 웃을 일도 사라지고
11. 머리숱_ 자연스럽다기엔 좀 억울하다
12. 에필로그_ 잃어버려서 잊어버린 걸까, 잊어버려서 잃어버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