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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진미 Sep 15. 2022

머리숱_ 자연스럽다기엔 좀 억울하다

이건 저주에 관한 이야기가 틀림없다. 나는 저주받았다. 내가 그 말을 내뱉는 순간부터 저주는 시작되었고 이제 막 그 저주의 본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과학적으로도 말이다. 내 머리숱으로 말하자면 엄마 뱃속에 있던 순간부터 간질간질 엄마의 자궁을 간질일 정도였다. 허풍이 아니다. 나를 받은 간호사는 입을 쩍 벌렸고 의사는 내 머리카락을 수풀처럼 헤치고 눈코입을 확인했다. 본 투 비 검은숲. 엄마 아빠는 혹시 몸에도 그런 털이 있는지를 물었고 다행히 그것은 머리에만 있을 뿐이었다. 아장아장 걸어 다니기 시작할 때, 나를 한번 본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강아지다 아니, 고양이다' 자기들끼리 지껄이고 있으면 마음이 상한 엄마가 나를 번쩍 들어 집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내 머리숱이 엄청났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엄마도 아빠도 빽빽한 삼나무 숲 같은 머리숱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학교에 들어가자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체육시간에 달리기를 하다가 묶은 머리가 풀려 사자탈을 쓴 듯 갈기를 휘날리며 뛰느라 앞이 보이지 않는 바람에 2등에게 역전을 당하기도 했으며, 선생님에게 혼나고 있는 심각한 순간에 하나로 묶었던 고무줄이 느닷없이 팅~ 소리와 함께 끊어지며 검은 폭포수처럼 머리가 쏟아져 아이들의 웃음보를 터트렸다. 또한 선생님은 두 부류였다. 내 머리숱에 찬사를 보내거나 질투했다. 대머리 선생님이 들어오는 날엔 괜히 애들이 히죽거리며 나와 비교하는 바람에 기분이 상한 선생님은 굳이 어려운 문제를 내서 나를 괴롭히기도 했다. 이놈의 머리숱.      


나는 내 머리숱이 싫었다. 미용실에 들어서면 나를 맡게 될 미용사의 불편한 얼굴을 보며 매번 미안해해야 했다. '어휴 이렇게 숱이 많으면 힘드시겠어요.' 그의 말은 자신에게 하는 중의적 표현이 분명했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머리를 뽑았고 보이지 않도록 칭칭 감아올리고 다녔다. 샴푸를 제대로 헹궈내지 않으면 빠진다는 소리에 대충 헹구기도 했지만 아서왕의 엑스칼리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더운 여름에 커트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머리를 짧게 잘랐다가는 묶지도 못한 채로 지옥의 뜨거움을 맛볼 것이 뻔했다.


머리를 묶고 다닌다고 딱히 해결되진 않았다. 묶은  머릿속은 사우나 수준의 열기가 펄펄 끓어댔으니까.   계절, 추운 겨울에 차가운 바람이 뒤에서 불면  머릿속 열기가 날려 더운 바람이 얼굴로 느껴지는 순간의 따뜻함. 겨울의  한순간만 좋았던  같다. 그것 외엔 장점이 없었다. 나이가 들며 주위 사람들의 머리숱이 점점 비어가며    올에 정성을 쏟는 동에도 나는 매번  머리를 함부로 취급했다. 드라이기마저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다. 마르지 않는다. 검은 폭포를 말리려면  팔과 시간을 걸어야 했기에  겨울에도 머리를 감고 그대로 외출하는  당연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절대로 잃어버릴 수 없을 거라 확신했던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내 그 검고 빽빽했던 머리카락들이 후드득, 우수수 사라지기 시작한 건, 내 입방정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 조금 무서워진다. 엄마와 집 근처를 산책하고 있던 날이었다. 가게의 전면을 유리로 만든 새로 생긴 미용실이 보였다. 멀리서부터 내부 인테리어를 보며 걷고 있었고 점점 미용실과 가까워진 순간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아저씨 두 명을 보았다. 머리카락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 미용실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게 이상했다. 막 미용실을 지나치며 말했다. “손질할 거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 순간 엄마가 소리쳤다. “야! 매너 없이 뭐라는 거야! 문도 열려 있는데!” 엄마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문이 열려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전면이 통유리라 닫혀 있는 줄 알았지 둘 중 한 명이라도 들었으면 이 실례를 어쩌나. 너무 당황한 나는 엄마를 두고 우어어어- 소리를 지르며 집으로 달렸다.      


정말로 그날부터였을까? 사람은 마음을 곱게 쓰고 말을 가려해야 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지. 형벌이다. 벌을 받고 있는 게 틀림없다. 놀랍게도 성경에도 탈모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이사야 3장 24절에서 교만한 시온의 딸들에게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맙소사. 성경에까지 탈모를 저주로 얘기하고 있다니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여자한테 게다가 숱한 머리털을 대머리가 대신한다니 진짜 저주였나 보다. 카이사르가 탈모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권력과 미모를 굳건히 지켜줄 월계관이라는 절묘한 방안을 찾아냈다는 재밌는 얘기도 있던데 그렇다고 내가 월계관을 쓰고 다닐 순 없지 않은가.


본 투 비 검은숲은 놀랍게도 조금씩 황폐해지고 있다.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한다는 걸 인지 한 건 탈모가 많이 진행된 뒤였다. 당연히 초기엔 알지 못했다. 나는 그럴 리가 없는 인물이니까. 가끔 샤워를 하고 나면 하수구가 막히는 일이 있었지만 관심 없었다. 이 머리숱이 줄기만 한다면 감사할 따름이다. 어라? 근데 언제부턴가 수건으로 말리는 순간에도 마치 라면을 먹다 뜨거워 놓친 면발처럼 후두둑 떨어지네? 그때까지도 나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탈모란 내 유전자 정보에 새겨 있지 않으니까. 나는 그저 요즘 스트레스가 많았던가를 한번 생각해보고 말았다. 뭐 기껏 빠져봤자 그다지 티도 안 날 것이므로.

     

하지만 속도가 붙기 시작하자 무서울 정도로 심해져 갔다. 어어어, 당황하며 손을 놓고 있던 사이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성 탈모 3단계에 진입했다. 더 이상 놀라거나 화를 낼 틈도 없었다. 나는 정신을 부여잡고 탈모샴푸와 헤어 메이컵 제품을 사고, 비오틴과 맥주효모를 허겁지겁 집어삼켰다. 그런 나를 보며 엄마는 그냥 두라고 했다. 자연스러운 거지 뭘 그렇게 까지 하냐고. 억울하다. 말도 안 돼. 자연스럽다니! 이렇게 부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아빠는 물론이고 80대 엄마의 머리카락은 멀리서 연필을 던져도 탄력 있게 꽂힐 만큼 아직도 짱짱한데 나의 이 휑한 정수리가 뭐냔 말이다. 어떻게 자연스럽다는 말을 할 수 있냐고 쏘아대자 엄마는 자기도 모르겠다며 웃고 만다. 나의 공포와 충격을 누가 이해할까. 소중한 머리카락을 잃어버린 이 억울함을 누가 알아줄까.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던 어리석었던 날들, 한 올 한 올의 소중함을 모르고 함부로 벅벅 빗어 대며 잃어버린 머리카락들. 흘러가 버린 시간만큼 안타까운, 하수구 어디쯤으로 흘러가버린 내 머리카락들을 기억하며 머리카락을 말린다. 물기를 닦을 때마다 머리카락이 떨어져 내리는 걸 눈으로 보면, 계단참을 헛디딘 순간처럼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떨어져 내린 머리카락을 한 손에 그러모아 휴지통에 버리며 내뱉는 깊은 탄식의 의미를 아는 자들이 내 곁엔 없다.     


그렇게 나는 머리숱을 잃고 겸손과 연대감을 얻었다. 그날의 아저씨들이 생각난다. 내 예의 없는 말을 듣고 얼마나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을까. 생각해보면 나는 아저씨들처럼 완전히 밀어 버릴 수도 없으니 더 큰일이 아닌가. 눈을 감고 조용히 마사지 빗을 꺼낸다. 통통통 정수리를 두드리며 나의 고마운 두피가 어제보다 오늘 더 건강해지길 빈다. 통통통 힘을 내어 얇디얇은 내 모근을 불끈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기를 희망한다. 통통통 더불어 그날의 아저씨들께 진심을 담아 용서를 구하고 또 구한다. 통통통.


 머리숱_ 2020년 7월부터 잃기 시작하여 현재 진행 중.

더는 잃어버리지 않도록 매일 아침 비오틴 한 알과 맥주효모 6알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삼키고 있다. 약속이 있을 때는 헤어 메이크업 제품으로 정수리를 두드리고 나간다. 요즘은 탈모 샴푸보다 좋았다는 글들에 혹해 도브 비누로 매일 머리를 감고 있다. 차가운 드라이기로 두피를 바짝 말리고 되도록 머리를 잡아당기는 끈이나 핀은 하지 않는다. 5일에 한 번씩 좌, 우, 중앙으로 가르마를 바꿔준다.



목록_     

01. 프롤로그_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방식

02. 서점_ 주인 모르게 홀로 팔아버린 책들

03. 리본_ 범인을 잡기 위해 놓은 덫에 걸린 나

04. 브래지어_ 입었을까 안 입었을까?

05. 미미_ 진짜는 무엇이고 가짜는 무엇인가

06. S_ 자기 나름의 이해란 곧 오해의 발판이다

07. M_ 나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어

08. 아빠_ 간신히 되찾았으나 기어코 잃어버렸다.

09. 분노_ 감정의 잔해더미에서 살아남기

10. 개그감_ 나이가 들면 웃을 일도 사라지고

11. 머리숱_ 자연스럽다기엔 좀 억울하다

12. 에필로그_ 잃어버려서 잊어버린 걸까, 잊어버려서 잃어버린 걸까?

이전 10화 개그감_ 나이가 들면 웃을 일도 사라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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