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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진미 Sep 26. 2022

아빠_ 간신히 되찾았으나 기어코 잃어버렸다

내가 6학년, 언니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잠결에 언니의 신음 소리를 듣고 일어나 언니를 깨웠다. 그러자 언니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고 내가 멍하니 앉아 있는 사이 안방에서 자던 엄마와 아빠가 달려왔다. 문을 벌컥 연 아빠의 걱정 가득한 얼굴이 아직도 기억난다. 아빠는 무서운 꿈을 꾼 거라며 무릎을 꿇고 언니를 안았다. '괜찮아. 괜찮아. 무서운 꿈을 꾼 것뿐이야. 아빠가 여기 있잖아.' 따뜻한 목소리로 울고 있는 언니를 달래며 등을 토닥였다. 엄마도 울고 있는 언니가 걱정되는 듯 물을 떠다 주었다. 나는 이불위에 덩그러니 앉아서 그 모습을 보았는데 잠결에도 부럽다는 감정이 강하게 느껴졌다. 아직도 그 장면은 영화 속의 강렬한 장면처럼 프레임 하나하나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다음날 아침 언니에게 무슨 꿈을 꿨냐고 물었지만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내 머릿속엔 며칠째 그 밤의 장면이 생생히 떠돌고 있었다. 그날 엄마와 아빠의 모습은 내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따듯함과 다정함이었다. 나도 엄마 아빠의 자식이니까 언니가 느꼈을 따듯함을 경험할 자격이 있었다. 며칠 뒤 모두가 잠든 밤에 나는 엉엉 소리 내서 울었다. 아니, 우는 척을 했다. 하지만 나에게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몽사몽인 언니가 시끄럽다고 소리치고 다시 잠들 뿐 나한테 달려오는 사람은 없었다.   

   

반은 부러움에, 반은 장난으로 시작했지만 갑자기 무서워졌다. 울음을 멈출 순 없었다. 불 꺼진 방 안에서 나 혼자 울음을 멈춰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두려웠다. 울음은 가짜에서 진짜로 넘어가고 있었다. 진짜로 버려진 것 같은 생각에 눈물이 계속 쏟아졌다. 갑자기 엄마 아빠가 농담처럼 내게 자주 하던 말, ‘저걸 왜 낳아서’라는 말이 머릿속을 울렸다. 그때 문이 열렸다. 절실한 마음으로 눈물범벅이 되어 바라본 그곳엔 구겨진 얼굴의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시끄럽게 안 자고 뭐 하냐고 소리치며 도로 문을 닫았다.

      

나이가 들어서도 나는 그 장면을 오래도록 생각했다. 아빠가 언니를 따듯하게 안아주며 한 말 ‘괜찮아. 아빠가 여기 있잖아.’ 그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를 더 달래 줬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엄마 아빠는 왜 그랬을까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다. 똑같은 자식이었으니 언니뿐 아니라 나 역시도 사랑했겠지만(오빠는 장남이니 딱히 언급할 필요도 없겠지) 그날을 생각하면 정신적인 느낌이 아니라 진짜 물리적인 느낌으로 심장 한 부분이 시큰시큰거린다.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을 아빠에게 들은 언니의 마음은 얼마나 벅찼을까? 아직도 때때로 궁금해진다.  

    

늘 구김 없고 자신만만하고 주위에 좋은 친구도 많고, 누구라도 쉽게 다가가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사람. 언니가 그렇게 성장한 이유는 아마도 자신이 사랑받고 항상 지지받는 존재임을 어려서부터 알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에 반해 나는 늘 불안하고 부정적인 감정들로 만들어진 존재였다. 친구들을 웃게 하는 나의 유일한 무기인 개그조차 자기 비하로부터 시작되었다. 만신창이가 된 나를 보며 웃는 친구들을 보면 뿌듯했다. 내가 저들을 웃겼다는 안도감은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정체모를 불안을 조금씩 가라앉혔다.   

   

하지만 가끔 친척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내가 막내라서 이쁨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런 상충되는 말이 어디 있나? 그렇다면 내 마음이 왜 매 순간 그렇게 불안하고 공허했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나의 포지션에 대한 입장이 조금 다르게 정리되었다. 늘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던 순간 불현듯 조금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가족들에게 의사소통이 되는 반려동물적인 존재였다는 생각.(당시엔 반려동물이란 개념 없이 개는 그냥 개였으므로 당시 '개'의 존재보다는 한 차원 위의 존재라는 뜻이다.)   

   

의사소통이 되니 막 대하진 않지만 조금쯤 함부로 대하게 되고, 가끔 기분이 좋으면 사랑을 주지만 다가오면 귀찮아지는 것이다. 인격적으로 딱히 존중하지 않는 인간과 귀여운 동물 사이의 애매한 포지션. 그 애매한 카테고리 안에서만 사랑을 주었던 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과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까 막내라 사랑을 받았다는 친척들의 말은, 가끔 귀여운 반려동물적인 존재에게 보였던 부모님의 단편적인 긍정의 말과 행동을 접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잊고 있다가도 가끔씩 그런 생각들이 들 때면 분노와 모멸감, 박탈감, 애증, 절망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폭풍처럼 나를 휘저었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지금은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어려운 날들이었고 가난했고 교육열도 낮은 환경에서 아이가 셋이나 있다. 새벽 6시에 가게 문을 열고 밤 12시에 닫는 고단한 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아이들 하나하나 눈을 맞춰주고 사랑을 듬뿍 줄 수 있을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는 법이니까. 당시의 사회는 그런 것들이 허용되는 시기였으니까. 이해한다. 그런 상황에선 나 역시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고단한 생활 속에서 자신들을 기쁘게 해주는 자식에게 더 정이 가는 건 당연하리라.


살아남으려면 무언가 필요했다. 장남이거나, 예쁘거나, 머리가 좋거나, 재능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착하기라도 해서 힘든 부모에게 인정받을 무엇이라도 손에 쥐고 있어야 했지만, 나는 고단한 생활에 지친 부모를 기쁘게 해 줄 그 어느 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면 홀로 살아남을 강인한 정신력이라도 지녀야 했다. 하지만 난 예쁘지 않았으며, 착하지도 않았고, 머리도 나빴으며, 잘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고 정신력 또한 약해 빠진 쓸모없는 존재였다.

      

나는 지우려다 살아난 아이일 뿐이었다. 내가 공부를 못하거나, 고분고분하지 않거나, 도에 넘게 까불거리면 가족들은 나를 보며 늘 같은 말을 했다. ‘저거 그때 지웠어야 했는데. 왜 낳아 가지고’ 어떤 가벼운 놀이처럼 엄마와 아빠, 언니와 오빠는 나에게 웃으면서도 화를 내면서도 모두가 같은 말을 했다. 엄마의 뱃속에서도 성격이 좋지 못했는지 배를 계속 걷어찼다고 들었다. 이미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터울 지게 아기가 생겼다. 왠지 딸인 것 같아 지우려고 결심한 순간 시작된 거친 발길질에 아빠는 분명히 아들일 거라고 그냥 낳자고 했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를 기쁘게 할 방법이 내게는 없었다.


오래 아팠던 아빠를 잃었다. 나는 마음을 닫은 채로 20대의 대부분을 살았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6학년 그날, 내 마음속에서 아빠를 잃어버렸던 것 같다. 어느 날 회사에 있던 나는 언니의 다급한 전화에 병원으로 향했다. 아빠의 눈은 이미 풀려 있었고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며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의사는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오빠는 일본에서 급하게 오는 중이었다. 엄마는 주저앉아 통곡을 했고 나는 공포감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울부짖으며 아빠를 껴안았다. 아빠 사랑해요! 늘 사랑했어요! 소리치는 언니를 보며 눈물이 터졌지만 나는 얼어붙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울었다.      


그때 아빠가 어눌한 말투로 나를 불렀다. '막... 내...' 언니가 급하게 내 손을 잡아끌었다. 가까이서 본 아빠는 이미 모든 것이 빠져나간 듯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내가 바보같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데 갑자기 아빠가 한쪽 팔을 들어 올리려는 게 보였다. 뻣뻣하게 굳은 팔을 힘겹게 들어 올린 아빠는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내 목 위로 털썩 팔을 떨어뜨리며 감싸 안았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어떤 감정이 폭포처럼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하지만 잠시 후 아빠는 떠났다. 나를 안아 주고서 나를 다시 두고 사라졌다. 내가 먼저 달려가 아빠를 안아주려고 했는데 아빠를 또다시 잃어버렸다. 영원히 찾을 수 없다.  

   

아빠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괴로운 날들이었다. 사랑받지 못했지만 사랑받은 내 존재에 대해 혼란스러웠다. 아빠가 떠난 지 몇 달이 지나도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어두운 방안에만 누워 있었다. 간신히 찾은 아빠를 내가 스스로 놓쳐 버린 것 같은 괴로움에 허덕였다. 매번 그 순간을 후회하고, 그 순간을 떠올리고, 그 순간을 잊으려 애썼다. 그러다 가만히 누워 밖을 내다보고 있던 어느 날, 1층 베란다 밖으로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엄마 뭐해?" 내가 부르자 엄마는 소쿠리 하나 가득 딴 작은 상추 잎을 들어 보였다.      


엄마는 미소를 띠며 상추는 물론 앵두나무도 심었다고 말했다. 아빠와 살던 시골집 앞마당에 있던 작은 앵두나무를 뿌리째 뽑아와 1층 아파트 밖에 심었다고 했다. 엄마는 앵두가 열리면 같이 따먹자며 활짝 웃었다. 당황한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엄마는 싱크대로 가 상추를 깨끗이 씻어 넣고 밥에 고추장과 참기름까지 둘러 가져왔다. 우리는 상추 비빔밥을 한 숟가락씩 떠먹으며 아빠 얘기를 하다가 잠시 웃었다.    

 

엄마는 아빠를 보내고 자신만의 정원을 만들었다. 아빠와 함께 했던 순간들을 고스란히 서울로 가져와 자신만의 방법으로 슬픔을 참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내 슬픔이 너무 커 보이지 않던 엄마의 슬픔이 그날 이후로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작은 정원은 오래가지 못했다. 앵두가 열리길 고대하며 물을 주고 벌레를 잡으며 키우던 어느 날 경비아저씨가 벨을 눌렀다. 아파트에 마음대로 나무를 심으면 안 된다고 부녀회에서 연락이 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인기척에 자다 일어나 문을 열어 보니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엄마는 창문 밖 베란다를 내다보며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언니는 조금도 쉬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계속해서 수업을 늘려갔다. 일본을 정신없이 오가던 오빠는 아빠의 산소에서 몰래 울었다. 새언니는 아빠가 좋아하던 반찬을 만들어 엄마에게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각자의 일상에서 잃어버린 아빠를 애도하려 애썼다. 저마다 거대하게 휘몰아치는 슬픔의 파도를 맨몸으로 막느라 모두가 급급한 날들이었다. 그날들은 너무도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소중한 누군가를 잃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가슴을 도려내는 듯 한 수많은 후회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그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독자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죽음을 계기로 그는 자신의 부재로 인해 완전히 소멸하는 동시에 반대로 자신의 현존 덕분에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이 세계만큼이나 거대한 존재가 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는 우리 삶에서 더 크고 많은 자리를 차지했어야 했던 존재, 극단적인 경우에는 우리 삶 전부에 해당하는 존재로까지 여겨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그가 다른 이들 중 한 사람에 불과한 존재라는 사실을,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찔함을 자아내는 이 사실을 외면하고자 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스스로 부과한 한계 내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로서는 누군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기란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을 비난할 여지가 여전히 남게 된다.

-<아주 편안한 죽음> 시몬 드 보부아르-


나는 전화기를 드는 순간, 네 목소리라는 것을 바로 알아채곤 했다.... 나는 네 목소리를 어떠한 인식 이전에 촉각으로 알아챘다. 네 목소리는 목소리가 실어오는 단어보다 앞서 말을 건넸고, 소중하고 귀한 얘기를 전해주었다. 삶은 네 웃음처럼, 그리고 네가 살아 있는 동안 내가 감지할 수 있었던 네 목소리처럼, 결코 끝나지 않고 침묵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그리움의 정원에서> 크리스티앙 보뱅-


이 슬픔은 ‘우리는 종착역에 도착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는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은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아빠_ 2003년 9월 28일 잃다.


목록_     

01. 프롤로그_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방식

02. 서점_ 주인 모르게 홀로 팔아버린 책들

03. 리본_ 범인을 잡기 위해 놓은 덫에 걸린 나

04. 브래지어_ 입었을까 안 입었을까?

05. 미미_ 진짜는 무엇이고 가짜는 무엇인가

06. S_ 자기 나름의 이해란 곧 오해의 발판이다

07. M_ 나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어

08. 아빠_ 간신히 되찾았으나 기어코 잃어버렸다

09. 분노_ 감정의 잔해더미에서 살아남기

10. 개그감_ 나이가 들면 웃을 일도 사라지고

11. 머리숱_ 자연스럽다기엔 좀 억울하다

12. 에필로그_ 잃어버려서 잊어버린 걸까, 잊어버려서 잃어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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