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무언 갈 잃어버린 뒤 강렬하게 기억 속에 남은 것은 마론인형이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미미. 뽀얗고 날씬한 몸에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미미는 금발머리에 분홍색과 파란색의 아이섀도를 섞은 눈 화장으로 미모를 뽐냈다. 게다가 발그레하게 한 듯 안 한 듯 자연스러운 볼터치는 미미에게 인격을 부여하는 것 같았다. 세상에 이렇게 예쁜 인형을 선물로 주다니. 엄마는 나를 정말 사랑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은주는 아직도 못난이 인형을 들고 다니던데 그에 비하면 나의 미미는 정말 눈부신 공주 중의 공주가 분명하다. 이것은 분명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인형들보다 한 차원 위의 것이었다. 나는 나의 미미가 정말 자랑스러웠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다.
현주네 집에서. 진짜 미미를. 보기 전까지는.
현주의 아빠는 가수였다. 반짝이는 파란 재킷을 입은 잘생긴 아저씨 사진이 현주네 거실에 커다랗게 걸려 있어서 놀러 갈 때마다 나는 아저씨 사진에 인사를 하곤 했다. 현주네 아빠는 집에 잘 오지 못하는 대신 현주에게 늘 선물을 보냈다. 예쁜 치마, 예쁜 신발, 신기한 필통, 멋진 장난감, 게다가 우리 슈퍼에서는 팔지 않는 처음 먹어보는 초콜릿 까지. 온갖 새로운 것들이 놀러 갈 때마다 거실에 쌓여 있었다. 그것들을 볼 때면 늘 부러운 마음이 있었지만 훗, 웬걸 이제 나에겐 미미가 있다. 미미가 있으니 이제 그 어느 것도 부럽지 않았다. 나의 미미는 현주가 가진 모든 새로운 것들을 물리쳐줬다. 늘씬한 다리로 사뿐사뿐 현주네 집을 걸어 들어가 금발을 휘날리며 도도한 얼굴로 현주의 장난감들을 내려다보곤 했다.
그날도 현주 아빠 사진에 인사를 건네고 나의 미미와 함께 거실에서 놀며 잠시 방에 들어간 현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에서 나온 현주는 나를 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였다. 막 현주가 뒤로 숨긴 팔을 앞으로 내밀었을 때, 나의 미미는 우아한 산책을 멈췄다. 도도하고 아름다운 미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건 현주의 미미였다. 나의 미미가 진짜 미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준 진짜 미미의 출연.
현주의 것은 어딘가 달라 보였다. 현주가 들고 있는 미미의 모습에 나는 갑작스러운 공포감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아이와 5년이라는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을 보낸 사람에게 누군가 자신과 똑 닮은 아이를 데리고 나타나 이 아이가 진짜 네 아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나의 미미를 뒤로 숨겼다. 얼핏 보기엔 비슷했지만 자세히 보니 나의 미미보다 좀 더 자연스러운 피부색을 지니고 있었다. 나의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던 현주는 놀랍게도 의자에 앉는 사람처럼 미미의 무릎을 구부렸다. 다리가 구부러진다고? 나는 그 모습에 깜짝 놀라 나의 미미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만져봐”
내가 받아 든 현주의 미미는 진짜 미미였다. 나의 미미에서 느껴졌던 차갑고 딱딱한 플라스틱의 느낌은 진짜 미미에게서 느껴지지 않았다. 말랑하고 보드라운 피부. 광택이 느껴지는 길고 굽실거리는 갈색의 머리카락. 사람의 모습처럼 자유자재로 굽혀지는 팔과 다리. 아름답지만 자연스러운 얼굴. 그것은, 그것은 너무도 진짜였다. 나는 굽혀지지 않는 두 팔과 다리를 딱딱하게 쭉 뻗은 채 디귿자로 바닥에 앉아 있는 나의 미미를 내려다보았다. 개털처럼 뻣뻣한 머리털과 인위적인 핑크빛이 도는 딱딱한 플라스틱. 그것은 그저 조악한 플라스틱 덩어리에 불과했다. 나는 미미의 다리도 펴주지 않은 채 서둘러 미미를 집어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울음이 터졌다. 미미 때문인지, 현주 때문인지, 엄마 때문인지, 나 때문인지 알지 못했지만 계속 눈물이 나와서 참을 수가 없었다. 슬픔과 좌절감, 누군가에게 인지 모를 배신감, 진짜가 아니라는 분노, 가짜를 들고 다녔다는 부끄러움. 그 순간 어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온갖 감정에 휩싸여 울어대는 동안 죄 없는 나의 미미만 덩그러니 바닥에 누워 있었다. 나는 나의 싸구려 미미를 노려보며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울었다. 이건 가짜라고 진짜 미미를 사달라고 떼를 썼지만 엄마는 사주지 않았다. 이게 미미지 뭐야! 엄마가 소리쳤다. 그거 말고 진짜 미미! 좋다고 실컷 가지고 놀더니 왜 변덕이야. 이것도 미미잖아. 엄마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화가 잔뜩 난 나는 미미를 다락방에 던져 넣었다. 며칠이 지나고 조금쯤 미미가 보고 싶었다. 나는 미미를 집에서만 갖고 놀기로 했다. 이제 미미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다. 현주의 손에 들린 진짜 미미가 동네를 활보하고 다니는 동안 나의 미미는 다락방에만 조용히 있어야 했다. 현주가 나에게 가짜 미미는 어디 있냐고 물었다. 그 뒤로 미미를 다락방에 숨겨 놓는 시간들이 일주일, 열흘, 한 달씩 길어졌다. 대충 비슷한 가짜를 갖느니 완전 가짜인 종이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게 속 편했다. 현주가 꼴도 보기 싫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과 골목에서 술래잡기를 하거나 종이 인형을 오리며 놀았다. 나의 미미는 어두운 다락방에서 오래도록 내려오지 못했고 그렇게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몇 달쯤 뒤인가 미미가 갑자기 생각나서 다락방을 뒤졌지만 미미는 보이지 않았다. 플라스틱 다리가 부러졌거나 얼굴이 더러워져 엄마가 버렸을까? 엄마는 모른다고 했다. 다른 짐들 사이에 섞여 있는 걸까?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미미는 보이지 않았고 나는 그렇게 미미를 잃어버렸다. 미미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누군가 나에게 그렇게 대한다면 어떨까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미미가 살아 있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그 뒤로 공주 인형 따위는 가지고 놀지 않았다.
재밌는 건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당시에 내가 미미를 잃어버린 건지, 꼴도 보기 싫어 직접 버린 건지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한때 미미를 사랑했으므로 직접 쓰레기통에 버리진 않았을 거라는 마음이 조금 남아 있다. 하지만 그 난리를 벌이고도 내가 미미를 그냥 두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어째 나를 잘 믿지 못할 것도 같다. 그렇다면 은근히 버리고 싶어 하는 와중에 잃어버리게 된 걸까? 모르겠다. 어쨌건 내가 미미를 진짜 잃어버린 건지 어딘가에 버린 건지 확률이 반반이라는 건 ‘잃어버리는 방식’에 대한 글의 시작점에 유의미하다.
김춘수의 시 <꽃>에서 의미 없는 존재였던 그는 이름을 불러주어 꽃이 되었다. 존재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그의 시는 또 있다.
촛불을 켜면 명경의 유리알, 의롱의 나전, 어린것들의 눈망울과 입 언저리, 이런 것들이 하나씩 살아난다. 차차 촉심이 서고 불이 제자리를 정하게 되면, 불빛은 방 안 그득히 원을 그리며 윤곽을 선명히 한다. 그러나 아직도 이 윤곽 안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 있다. 들여다보면 한바다의 수심과 같다. 고요하다. 너무 고요할 따름이다. - 김춘수 <어둠> -
하이데거 또한 작은 사물에도 어떤 의미가 있다는 걸 중요시 했다고 한다.
하이데거는 흔한 사물에서 뜻하지 않은 비밀스러운, 신비롭기까지 한 면모를 발견해내는 데 능했다. 반 고흐의 유명한 그림 속에 그려진 낡고 헤진 농부 신발 한 켤레를 보면서 하이데거는 농부의 삶 속의 많은 차원들을 떠올리는 데 성공했다. - 라이너 루핑 <철학의 도구상자> -
다락방에서 나는 미미의 이름을 불렀어야 했다. 뾰로통한 얼굴로 가짜 미미에 대한 원망을 간직한 채 그저 뒤적뒤적 찾는 시늉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즐겁게 해 주었던 나의 미미를 떠올리며 미미의 이름을 불렀어야 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했던 하이데거의 말처럼 나는 미미의 존재를 나만의 언어 안에 두지 못했다. 나는 미미의 존재를 의심했다. 아마도 미미는 불빛의 윤곽 밖에서 나를 애타게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촛불을 들고 다락방으로 올라가 미미를 더 오래 찾아보았어야 했다. 불빛의 원 밖에, 선명한 윤곽 너머 한바다의 고요한 수심 속에서 다리가 부러진 채 홀로 나를 기다렸을 미미. 하지만 결국 나는 미미를 영영 빛의 윤곽 밖, 어둠의 어느 한 곳에서 잃어버리고 말았다.
미미인형_ 198*년 8월 초 잃어버림.
198*년 6월 여름 엄마가 사준 저가의 마론 인형.
애지중지하며 한 달간 가지고 다녔지만 친구의 진짜 미미를 보고 난 뒤 나의 미미를 외면,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완전히 잃어버림.
목록_
01. 프롤로그_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방식
02. 서점_ 주인 모르게 홀로 팔아버린 책들
03. 리본_ 범인을 잡기 위해 놓은 덫에 걸린 나
04. 브래지어_ 입었을까 안 입었을까?
05. 미미_ 진짜는 무엇이고 가짜는 무엇인가
06. S_ 자기 나름의 이해란 곧 오해의 발판이다
07. M_ 나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어
08. 아빠_ 간신히 되찾았으나 기어코 잃어버렸다.
09. 분노_ 감정의 잔해더미에서 살아남기
10. 개그감_ 나이가 들면 웃을 일도 사라지고
11. 머리숱_ 자연스럽다기엔 좀 억울하다
12. 에필로그_ 잃어버려서 잊어버린 걸까, 잊어버려서 잃어버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