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대. 갓다. 스텐. 삽. 건축공구. 철근. 샷시. 유리문에 써 놓은 글씨들은 조금씩 지워져 있었다. 원하는 걸 만들어주고 간단한 자재들을 팔기도 하고, 지방에 큰 공사가 있을 때는 며칠씩 일을 해주러 가기도 했다. 혁은 철공소 안을 둘러보았다. 기름때와 철가루들로 시커멓고 끈쩍한 바닥. 철근이며 앵글과 기계 등. 여러 가지 금속자재들이 가득하다. 시커먼 쇳가루들이 공기 중에 떠도는 작은 철공소가 혁에게는 가장 포근하고 편안한 곳이었다.
흐읍. 공기를 들이 마시자 미세한 쇳가루의 입자들이 콧속으로 밀려들어왔다. 공기 속에서 녹슨 쇠의 맛이 느껴졌다. 평생을 맡아 온 비릿한 쇠의 냄새. 혁은 다시 한 번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혁의 세계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냄새. 혁은 이곳을 떠나서는 살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살게 해 준 곳. 자신이 사람으로 태어나게 도와준 것이 바로 철이었다.
-구로동 좀 다녀와라.
-또?
-클램프랑 먹줄. 조씨네로 가고. 첫 번째 블록 두 번째 집이다.
짜증이 났다. 아빠의 의도를 모르는 바 아니나 이런다고 자신이 용접일에 정을 붙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버스 뒷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데 거의 다 와서 버스가 꼼짝 하지 않는다. 사고가 난 모양이다. 창밖으로 손에 든 책을 읽으며 걷는 학생이 보인다. 철은 또래 아이가 사라질때까지 가만히 그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돌연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잡다한 공구들을 사러 가는 것도 쪽팔렸다. 한번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점차 몸을 불렸다. 다른 생각을 하려해도 자꾸만 틈을 비집고 들어와 화가 치솟았다. 급기야 철은 버스에서 내려 근처 피시방으로 향했다. 주머니에 들어있는 수표 한 장이 보호자인 듯 든든한 느낌에 주머니에 넣은 손을 꼭 쥐었다. 안 가겠다고 마음먹자 가시처럼 불편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빠에게 얻어터지는 건 그 다음 일이었다.
철은 언제부터 용접이 싫어졌는지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를 입학한 얼마 뒤부터였다. 그 전에는 아빠가 하는 일이 진짜 남자들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용접하는 아빠의 뒷모습만 봐도 가슴이 뛰었다. 나도 커서 아빠처럼 불과 쇠를 다루는 일을 할 거야. 유치원에서 기다란 실로폰 채를 들고 블록들을 쌓아 둔 채 용접놀이를 하곤 했다. 학교에 입학을 하고 일주일쯤 다른 아이들은 엄마가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 나도 아빠에게 오라고 해야지. 세상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아빠라는 걸 나도 친구들에게 보여줘야지. 철은 아빠를 졸랐고 혁은 웃으며 아들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직 수업이 끝나지 않았다. 아들을 기다리던 혁은 이곳저곳으로 눈을 돌리다가 학교 구석에서 텅 빈 놀이터를 발견했다. 바글바글 아이들이 매달려 있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항상 널뛰던 시소와 그네는 피곤한 얼굴로 누워있었다. 혁은 무언가에 끌리듯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네와 미끄럼틀을 보다가 정글짐까지 이르렀고 자신도 모르게 용접부분들을 살피고 있었다. 대부분의 용접이 마뜩찮았다. 불량은 아니었지만 급하게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기저기 지저분한 용접부분들이 거슬렸다. 다시 보니 정글짐뿐 아니라 미끄럼틀과 그네도 마찬가지였다. 정리되지 않은 스패터가 잔뜩 남아 있었다. 아이들이 놀다가 손을 다칠까 걱정됐다. 끌이라도 가져왔으면 긁어주고 갈 것을... 혁은 손톱으로 좁쌀같이 붙어있는 스패터들을 긁어내려 애쓰며 중얼거렸다.
쭈그리고 앉아 바닥에 있는 시소의 상태를 살피는 데 누군가 혁의 등을 톡톡 건드렸다. 아저씨 좀 비켜주실래요? 깜짝 놀란 혁이 일어서자 어느새 놀이터엔 아이들이 가득 차 있는 게 보였다. 혁이 놀이기구들의 용접상태를 살피는 사이에 수업이 끝난 모양이었다. 벌써 정글짐 꼭대기까지 올라간 아이들이 손을 흔들었다. 왜 아무소리도 듣지 못했을까. 혁은 자신을 책망하며 몸을 돌렸다. 교실 건물 쪽으로 막 가려던 혁이 우뚝 멈췄다. 바로 뒤에 있던 모래놀이터 너머에 철이 가만히 서서 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얼굴에는 원망의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철아! 아빠가 종 쳤는 줄 모르고
-아까부터 여기서 아빠 부르고 있었어.
-아까?
-아빠가 시소 볼 때부터 계속 불렀어.
시소 위에 올라앉은 여자아이들이 혁과 철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발을 굴렀다. 잠에서 깬 시소가 하품을 했다. 삐걱 삐걱, 혁이 손을 뻗었지만 철은 안기지 않았다.
오늘만은 자기를 데리러 온다고 약속했던 아빠가 아니던가. 누구보다 먼저 교실 밖으로 뛰어 나왔지만 아빠는 없었다. 교문 앞에도 보이지 않았다. 울음이 나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운동장으로 뛰어가던 성수가 같이 가자고 했지만 그러기 싫었다. 운동장에서 먼지를 날리며 노는 아이들을 보다가 다시 교문 쪽을 둘러봐도 아빠는 없었다. 약속을 잊어버린 게 분명했다.
철은 애꿎은 신발주머니를 빙글빙글 돌렸다. 어깨가 빠질 만큼 세게 돌리다 손을 탁 놓자 신발주머니는 멀리 날아가며 실내화를 토해냈다. 널부러져 있는 그것들을 향해 걷다가 저만치 운동장 끝에 있는 아빠를 발견했다. 아빠다! 아빠! 철은 소리쳤다. 실내화를 얼른 챙기고 다시 한 번 부르며 뛰었지만 혁은 돌아보지 않았다. 아빠! 놀이터 앞까지 소리치며 가는데도 돌아보기는커녕 놀이 기구들만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있었다.
철공소에서 용접을 하던 자세 그대로였다. 용접기만 손에 쥐어 준다면 모든 걸 새롭게 만들어 놓을 게 분명했다. 자신이 만든 제작물들을 만져보며 뿌듯해하던 모습 그대로 그곳에 있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그날, 어린 철은 아빠의 뒷모습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정확히 어떤 기분인지 말로 표현 할 수 없지만 기분이 나빴고. 그런 모습이 싫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 매운 코를 비볐다. 소맷부리에 남아있던 매캐한 운동장의 먼지가 콧속을 파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