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자신과 다르다는 걸 혁은 알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픈 책을 철은 좋아했다. 아들의 나이 때 그는 한 번도 책을 읽어 본 적이 없었다. 철이 책을 애지중지 하기 시작한 건, 책을 읽어주던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을 때부터였다. 그 뒤로 혼이 난 뒤에는 늘 방에 틀어박혀 낡은 책을 잡았다. 녀석의 저런 모습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혁은 책장을 뒤적이는 철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이 싫었다. 그것은 다른 세계. 자신이 다가 갈 수 없는 세계였다. 철이 자신에게서 도망가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럴때마다 혁은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꼈다.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열자 철이 인상을 구기며 소리쳤다.
-인기척 좀 내라고!
혁의 손에는 책이 잔뜩 쌓여 있었다. 손에 감정이 있다면 책을 안고 있는 혁의 손은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을 터였다. <용접기능사자격시험>, <용접과 공학>, <예술과 용접>, <실전용접>, <용접 필기 기출문제>, <핵심용접용어>, <용접단기완성> 책은 온통 용접에 관한 것이었다.
-이걸 어쩌라고?
혁이 쿵, 책들을 내려놓았다.
-넌 금방 딸 수 있을 거야. 기술은 나한테 배우면 되고.
-관심 없다고 했잖아.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오갔다. 팽팽한 공기. 단단한 침묵을 깬 건 혁이었다.
-그럼 뭐해먹고 살 거냐. 나라에서 주는 자격증이야! 인정하는 거란 말이다. 어디 가서 굶을 일 없고, 정 안 되면 내 꺼 내가 만들어 살면 되는 거고. 더 이상 말할 거 없다. 무조건 하는 거야.
혁은 원망하는 철을 외면하며 방을 나섰다.
철은 짜증이 솟구쳤다. 화가 치밀어 올라 그것들을 바닥으로 밀어 버리려다가 밑쪽에서 <예술과 용접>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목차를 보니 예술작품에 사용되는 용접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빠는 바보같이‘용접’이라는 단어만 보고 무조건 쓸어 담은 게 분명했다. 아니, 직원에게 용접과 관련된 책들을 모조리 담아달라고 했을 것이다. 아빠가 직원에게 부탁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예술과 용접>을 뒤적였다. 아빠는 자신이 준 책을 읽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나는 내가 흥미 있는 부분을 읽을 뿐이니 표면적으로 아빠도 자신도 손해 볼 건 없다고 생각했다.
책에 실린 사진들은 흥미로웠다. 기괴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예술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철의 머리로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보자니 또 그렇게 보이는 게 흥미로웠다. 약간은 충격적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치를 떨던 것이 이렇게도 쓰일 수 있다는 게 당혹스러웠다. 30분쯤 책을 넘겨보다가 아빠가 부르는 소리에 일어섰다.
혁은 벌써 연습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손에는 작업복과 용접면이 들려 있었다. 자, 이제 용접면을 쓰고 토치를 집어라. 철은 대꾸 없이 작업복을 입고 용접면을 썼다. 아빠의 돈으로 이곳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는 한 반기를 드는 것은 한계가 있다. 어느 정도 맞춰주는 것도 적에게서 나를 지키는 일이라고 철은 생각했다. 토치를 들고 자세를 잡았다. 끔찍하게도 싫어하는 일을 너무도 태평하게 시키는 아빠가 대단해 보이기까지 했다. 일반인들이라면 입고 걷기에도 끔찍할 만큼 무겁고 더운 옷이었다. 거기다 두 겹의 장갑에 용접면까지 쓰고 나면 자신은 영락없이 인간이 아닌 것이 되 버린 기분이었다. 무거운 것들에 짓눌려 아무 곳으로도 도망갈 수 없는 아빠의 꼭두각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