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주는 그 남자를 사랑했다. 은발로 물들인 게 분명해보였지만, 그건 원래 그 남자의 머리색이라고 현주는 화를 냈다. 그에게서는 처음부터 그런 머리카락밖에 자라지 않는다고. 그의 예술성과 아름다운 은발을 따로 생각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미쳤다. 니가 미친 게 틀림없다고 혁은 울먹이며 말했지만 현주는 게의치 않았다. 예술가를 사랑하려면 그 수밖에 없어. 현주는 당연하다는 듯 받아쳤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현주가 그 회색 말꼬리를 따라 미국으로 갔는지 프랑스로 갔는지는 모르지만 그 남자와 함께 이 나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건 확실했다.
-너를 사랑하지 않는댔어! 나한테 말했다고. 현주야 제발!
-상관없어. 예술은 사랑하는 거지, 사랑받는 게 아니니까.
-제정신이 아니구나...
혁은 울고 있는 아기를 어르며 말했다. 현주는 완전히 귀를 닫아 버렸다. 그녀의 세상엔 오직 회색 말꼬리 남자만이 존재했다. 늘 동경해 오던 예술가를, 항상 갈망하던 예술을 위해서라면 자신쯤 희생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날 좀 이해해 줘. 현주는 오히려 애걸했다. 현주야. 아기 좀 봐.. 혁은 우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흔들며 말했다.
-이것 봐, 니 아이야.
현주는 다른 곳을 보았다. 혁이 아이를 들어 올려 얼굴 앞으로 가져다 댔지만 끝내 외면했다. 코끝으로 부드럽고 말캉한 아이의 살 냄새가 분명하게 느껴져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것은 족쇄였다. 여기서 무너지면 자신은 영영 시뻘겋게 달궈진 쇳덩어리 위에서 살게 될 거라고 말했다. 현주는 아이의 살 냄새를 맡지 않으려는 듯 눈을 꼭 감았다. 혁은 현주의 마음이 돌아서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다. 그럼 몇 달만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아이가 엄마의 품을 조금만 느낄 수 있게 몇 달만. 현주는 고개를 저었다. 다만 세 달이라도, 두 달이라도 그것도 아니면 한 달만...
현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혁은 그것을 허락으로 받아 들였다. 비정하지만 그래도 아직 어미의 정은 남아 있구나 싶어 안도했다. 어쩌면 현주의 마음을 돌릴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매일 일을 하고 들어오면 지저분한 집안을 치우고 밥을 했다. 현주의 눈치를 살피며 아기를 돌봤다. 현주는 자주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지만 별 탈 없이 한 달을 지냈다. 그래. 이렇게 두 달 세 달이 지나면 되는 거야. 1년이 되고 2년이 될 거야. 우리가 함께 키우자. 이제 가족이 되고 소풍도 갈 수 있겠지.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 체육대회도 보러 갈 거야. 혁은 불안한 마음을 다잡았다. 현주는 회색머리의 예술가와 연락을 끊은 것 같았다. 전화도, 밖으로 나가는 일도 별로 없었다.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포동포동 살이 올랐고 눈빛은 더욱 총명해졌다. 아이가 웃으면 현주가 따라 웃는 걸 보고 가슴이 벅찼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을. 현주가 자신과 아이를 이용했을 뿐이라는 걸 알게 된 건 두 달을 꼭 채우고 난 뒤였다. 두 달을 그렇게 살게 됐던 날, 혁은 현주에게 고맙다는 표시를 하고 싶었다. 백화점에 가서 목걸이를 샀다. 꽃도 사고, 오는 길에 정류장 앞에 있는 빵집에 들러 하얀 생크림 케이크도 샀다. 두 손 가득 선물을 들고 들어 온 집에 현주는 없었다. 아이 혼자 버둥거리며 차가운 바닥에 놓여 있을 뿐 현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처음 현주를 달래기 위해 보여준 통장이 화근이었다. 이것 봐. 이렇게 많이 모았어. 너를 위해. 너랑 나를 위해서 말이야. 봐. 이거 다 니 꺼야. 현주야. 우리 이제 아기랑 같이 잘 살자. 그날, 통장을 보며 유독 눈을 빛내던 현주가 떠올랐다.
혁은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은 아기를 들어 올렸다. 분노와, 증오와, 절망과, 비감함이 한데 뭉쳐 단단한 돌덩이처럼 날아와 혁을 공격했다. 던져. 아이를 던져버려. 혁은 귓가를 쟁쟁 울리는 더러운 목소리를 들었다. 마른 모래 한웅큼으로 만들어 진 듯 아이는 가벼웠다. 바닥에 던져.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었던 때로 돌아가는 거야. 알알이 흩어져 사라지고 말거야. 괜찮아. 어서 던져! 혁은 이를 물고 아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막 아이를 바닥으로 내리 꽂으려던 그 순간, 마지막으로 고개를 내민 그 샛노란 감정이 아니었다면 혁은 아이를 차가운 바닥에 집어 던졌을 것이다.
그때, 단 하나의 감정이 고개를 내밀고 혁의 분노를 쓰다듬었다.
터질 것처럼 부푼 심장을, 솟아오르는 핏물을 차갑게 가라 앉혀 주었다. 혁은 숨을 몰아쉬었다. 눈물을 흘리며 위로 들어 올린 아이를 가슴께로 내려 안았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머릿속을 찌르던 가시 같던 감정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아이의 손을 꼭 쥐었다. 아이는 선하고 검은 눈을 반짝이며 혁의 눈동자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복수로 불타오르는 샛노란 눈동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