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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진미 Sep 20. 2019

[말] 예리한 언어의 촉수들

언어로 드러나는 깊이에의 문제

short story, [괴물을 잡고 싶어]


말은 입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언어는 모든 것으로부터 발화된다. 숨소리, 눈빛, 공기의 파장, 상대를 스치는 순간의 바람, 작은 발자국 소리. 나와 타인 사이의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이 말(言)이다. 행동이 말이고 생각이 말이다.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 또한 말이 된다. 그것은 단지 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왜 몰랐을까. 아니, 어쩌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부모님의 호통에 발을 구르고 입을 삐죽이던 행동. 몽둥이를 휘두르던 선생님 뒤통수에 던졌던 증오의 눈빛. 술자리를 강요하는 부장의 등 뒤에서 소심하게 휘둘렀던 주먹. 하청 직원에게 보냈던 거짓 미소 속의 진짜 미소. 인지하고 있지 못했을 뿐, 오래전부터 그 모든 것은 분명한 언어였다.      


처음 S가 말이 아닌 말을 인지했던 건, 퇴사 통보를 받은 지 1년이 되어 갈 무렵이었다. 오랜 세월 S는 회사가 자신에게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기에 조용히 회사를 나왔다. 5년간 함께 했던 룸메이트는 놀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걱정 말라며 좀 쉬어도 좋을 거라 말했다. 집에 있는 날이 늘어 6개월이 훌쩍 지났다. 얼마 쉰 것 같지도 않은데. 아무것도 아직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시간이 그렇게 빨리 흩어져 버렸다는 게 놀라웠다. 일자리는 찾지 못했다. S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통장의 액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9개월째는 적금과 보험을 깨야 했다. 생활하기가 빠듯해졌다. 집세도 생활비도 밀렸다.


S를 대하는 룸메이트의 말수는 줄어들었고 표정도 달라졌다. 언제부턴가 거실에서 마주쳐도 말을 걸지 않았다. 아니, 녀석은 끊임없이 말했다. 말을 하지 않음으로 말했다. 얼굴로, 걸음걸이로, 행동으로, 눈빛으로, 공기의 질감으로 격렬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처음엔 자신에게 뭐라고 한 것 같아서 돌아봤지만 그의 입은 굳게 닫혀있었다. 혹시 복화술을 하는 걸까? S는 녀석을 더욱 자세히 봤지만 그런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리 시끄러울까. 녀석이 혀를 제외한 모든 것으로 말을 하고 있다는 걸 S는 알지 못했다.







small talk, [말의 의미]


말은 입을 통해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성대를 통해 나오는 것은 그저 목소리. 말은 목소리와 다르다. 말은 의미이며 의도이다. 내가 타자에게 전하고 싶은 나의 마음이다. 나도 미처 모르고 있던 내 마음속의 진심이다.


타인에게 어떤 눈빛도 감정의 동요도 없다는 것은 할 말이 없다는 것이며, 할 말이 없다는 것은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말은 마음이다. 마음이야말로 타인에게 전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마음으로부터 사랑이 시작되고 미움도 시작된다. 그 모든 것의 처음이 결국 타인에게 전하는 나의 말이다.


진심을 건성으로 듣고 넘기는 무심한 눈빛, 계산대에 동전을 후드득 내려놓는 행동, 실수인 척 상대에게 상처를 내는 말들. 그 모든 것들은 바로 당신의 것. 의도치 않은 행동들이지만 결국 그것들은 하나둘 자신에게로 돌아와 고스란히 당신의 것이 된다. 진심으로 했던 말들과 진심이 아닌 채 내뱉었던 수많은 말들은 당신을 둘러싸고 온전한 당신의 자리가 된다.


 등단을 한 후 힘들어하던 순간에 타인들의 말은 나에게 상처가 됐다. 의심할 여지없이 좋은 사람들. 그들은 나의 모든 것이었고 나를 지켜주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무심히 내뱉는 말들이, 그들의 무례한 행동들이 자꾸만 내게 상처를 내고 있다는 걸 나는 외면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을 때 조용히 들여다보면 곪아 터진 상처에서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더는 안 될 듯싶어 마음을 표현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내 생각과 달랐다.


"글 쓰는 사람들은 역시 예민해"

"마음을 좀 편하게 먹지 그래?"

"이제 불편해서 너랑은 뭔 말을 못 하겠다"


안쓰러워하는 눈빛들, '여유가 없을 테니 이건 내가 살게.' 라며 덜컥 계산서를 들고 일어서는 모습. 말로 하지 않았으니 그들은 상대에게 나름의 예를 다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날들이 지나고 조금쯤 마음이 편해졌을 때 나는 나의 말을 들여다보았다.


나의 언어. 나의 말들은 누구에게 날아가 박혔을까.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는 눈빛과, 나의 무심한 행동들과, 타이르듯 말하던 거친 말들이 부끄러워진다. 그것들은 나의 모습 그대로 타인에게 다가섰겠지. 날카로운 언어의 날을 받아 낸 상대의 하루는 힘겨웠으리라. 아무 말 없이 그 순간을 감내하던 타인의 모습들이 떠올라 정신이 아득해진다.


어디서 시작됐을 지모를 예리한 언어의 촉수들이 허공에 가득하다.

누구에게로도 가 닿지 않고 흩어져 사라지기를 바라본다.



당신은 오늘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하셨나요?
입으로 하는 말 말고, 당신의 눈빛 당신이 멈칫거리던
그 짧은 순간의 행동도 당신의 언어였다는 걸 알고 계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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