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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진미 Sep 25. 2019

백선생도 구원하지 못하는 파괴 왕


지금이야 어른도 아이도 백종원을 모두 알지만 내가 TV에서 처음 본 건 몇 해 전이었다. 아- 나는 요리엔 젬병이구나... 요리에 재능이 없음을 느끼며 좌절할 즈음, 백선생이라는 처음 보는 남자가 ‘내가 너희를 구원하리라’ 짠 나타났다. 계량을 대충대충 하면서도 맛을 보장한다는 말에 나는 눈이 번쩍 뜨여 그가 나오는 프로를 매번 즐겨보았다.


그래, 집에 있는 걸로 저렇게 해야 진짜지! 어머, 인상은 또 얼마나 푸근하고 정감이 가는 가.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인지 백선생의 인기는 점점 높아지고 급기야 나도 백선생이 가르쳐준 만능간장을 만들어 보기로 결심했다. 



다른 재료도 필요 없고 간장과 간 돼지고기와 설탕만 있으면 된대! 할렐루야!



일단 간장 여섯 컵에 돼지고기 간 것 대충 3컵, 그리고 설탕을 한 컵 넣고 푸르르 끓어오르면 끝. 오오! 만들고 보니 고기가 둥둥 떠있는 게 왠지 시커먼 간장일 뿐임에도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이제 이걸로 두부를 졸이고 야채를 볶고 하면 된다는 말이지? 그럼 일단 집에 있는 것부터 볶아 보자! 냉장고를 이리저리 뒤지다가 시들어가고 있는 가지를 찾아냈다. 


드디어 나도 감칠맛 나는 가지볶음을 먹어보는구나 싶어 서둘러 가지를 잘랐다. 프라이팬에 불을 올리고 기름을 좀 두르고 가지를 넣고 잠깐 있다 와보니 프라이팬에 기름이 없어졌다. 다시 기름을 넣고 몇 번 뒤적이니 어라? 또 금세 사라지는 게 아닌가. 기름 한 방울 없는 프라이팬 위에서 가지가 탈까 걱정이 됐던 나는 또다시 얼른 기름을 넣었다. 그러길 몇 번. 


그리고 드디어 대망의 만능간장! 고기가 둥둥 떠 있는 간장을 크게 한 국자 떠서 볶고 있던 가지 안으로 넣었다. 간장이 뜨거운 팬에 촤르르 둘러지며 맛있는 소리와 냄새가 함께 풍겼다. 자글자글 졸여지는 가지의 냄새를 맡고 있자니 벌써 성공한 것 같아 흥이 났다. 미처 내가 맛을 보기 전까지는.


예쁜 그릇에 담아내자 이것은 하나의 아름다운 요리! 하지만 정갈하게 담긴 가지를 하나 집어 입에 넣자마자 나는 그것을 뱉어 냈다. 가지가 스펀지처럼 기름을 흡수한다는 걸 깜빡했던 나는 기름을 한도 끝도 없이 들이부었던 게 떠올랐다. 만능간장을 가지고 있다는 든든함에 홀려 다른 건 생각하지 못했던 참사였다. 향긋해야 할 가지가 어찌나 느끼하고 짜기만 하던지… 근데 왜 이렇게 짜지? 설탕을 안 넣었나?... .



"만능간장이라며! 쉽게 집에 있는 재료로 맛있게 해 준다며! 요리가 된다며!"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간장이 만능이지 그전까지는 알아서 각자 해결해야 하는 것이겠지.


간장만 만능이면 뭐하나, 내가 파괴 왕인 걸.. 그냥 티브이나 보자.

기름을 잔뜩 흡수한 가지 하나를 다시 한번 입에 물어볼까? 

아니다. 그냥 TV 속 백선생의 마법이나 감상하자. 




https://brunch.co.kr/@doubleb/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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