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진미 Sep 24. 2019

[여주볶음] 여주의 맛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


파괴의 신이라도 종종 실수를 할 때가 있다. 가끔 눈이 반짝 뜨일 만큼 맛있는 요리가 나오기도 한단 말이지. 매번 못 먹을 정도로 파괴만 하는 건 아니란 말씀. 그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름의 맛은 '여주'


창밖으로 여름의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여주가 언제 나오는지를 묻고 다니곤 한다. 시장 한 구석에 푸른 여주가 쌓여있는 것을 보면 한걸음에 달려가서 구경하는 게 즐거움인데 어쩐지 올해는 한 여름이 되도록 여주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다 올해 여주는 구경도 못하겠다 싶어  옆동네 시장까지 가서 기어이 여주를 한 소쿠리나 사 가지고 왔다. 여주의 오돌토돌한 돌기 좀 보라지. 한여름을 견디느라 땀을 송골송골 흘리고 있어. 귀여워!


아이에게 여주를 볶아 입에 넣어줬더니,

"이거 먹으면 안 되는 거야!"


기겁을 하며 뱉어 낸다. 이 맛있는 걸 뱉어 내다니. 찡그리는 아이의 얼굴이 너무 예뻐 웃음이 난다. 하긴, 처음엔 나도 그랬지. 쓰디쓴 여주. 사실, 여주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느껴본 자만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맛이거든. 기름을 두른 팬에 얇게 자른 여주를 넣고 달걀과 토마토, 거기다가 약간의 베이컨을 추가해서 볶기만 하면 완벽한 인생의 맛이 탄생한다. 물론 시원한 맥주를 한잔 곁들여야지만 진짜 어른의 맛이지.


인생의 쓴 맛을 보지 못한 자는 여주의 맛을 알지 못한다. 쓰디쓴 여름의 맛. 고된 인생의 맛을 알고 있는 자들만이 여주의 쓴 맛 뒤에 따라오는 달큼한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 그야말로 짙푸른 계절의 맛.


인간은 두 부류로 나뉘지. 쓴 맛을 아직 보지 못한 자와 쓴 맛을 보자마자 놀라서 달아 난 자들이 한 부류, 그리고 다른 쪽은 삶의 쓴 맛을 기어코 감내한 자들. 물론 나는 쓴 맛을 감내한 자들 중 하나라 생각한다.


삶은 원래 쓴맛과 단맛이 섞여 온다. 쓰고 달고, 달다가 쓰고. 누구나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둘러보니 남들은 대충 밸런스가 비슷하게 번갈아 오거나, '쓰다 달다 달다달다 쓰다 달다' 더 좋게 오는 것도 같은데, 유독 나의 파동이 좀 다르게 느껴지는 건, 그저 내 기분 탓이겠지? 어쩐지 내 생의 곡선은,,,,

쓰왑!씁씁썹 달짝 씁씁쓰왑쌉쌉! 달.. 쌉쌉씁씁써왓씁써써! .... ..



여주는 길게 반을 갈라 하얀 속을 파내고 소금물에 잠깐 담가 두면 쓴 맛이 빠진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소금물에 담지 않지. 쓰왑쌉쌉썹씁쌉한 삶을 살아온 나는 그 쓴 맛이 여주의 참 맛이라는 걸 알지.


처음 입 안을 강타하는 쓰디쓴 맛은 씹을수록 차분해지고 씁쓸한 맛만 남는다. 뒤이어 오는 달걀의 부드러움과 토마토의 신선함, 그리고 베이컨의 확실한 개성이 여주의 쓴 맛을 중화시키는 것이다. 부드러움과 쓴맛, 그리고 신선함이 함께 어우러져 더욱 풍부한 맛이 된다.


한 입가득 여주를 씹으며 삶의 길을 되짚어 본다.

아무렴, 쓴 맛에서 뽑아낸 극강의 맛을 느낄 수 있어야 진짜 어른이지.


센 불에 휘리릭 볶아내는 삶의 기술-

그것은 인생의 맛, 여주의 맛




https://brunch.co.kr/@doubleb/54


https://brunch.co.kr/@doubleb/63


작가의 이전글 [카레] 카레를 망치는 건 아무나 할 수 없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