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진미 Sep 26. 2019

[여행] 그것은 간절한 기도처럼

여행으로 환기되는 일상의 의미

 short story, [경멸의 나날들]


섭은 어둠 속에 한동안 서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쪽으로 밀리듯 걷는 게 용암의 흐름처럼 느껴져 꼼짝할 수 없었다. 동굴의 벽면엔 용암유선 자국이 뚜렷했다. 누군가 갈고리로 홈을 파 놓은 듯 길고 일정한 여러 개의 선들이 끝까지 이어졌다. 팔을 뻗어 용암유선에 손을 댄 섭은 눈을 감는다. 용암의 웅장한 걸음걸이. 느리고 무겁게 꿀렁이며 밀려가는 밀도 높은 열망들. 뜨거운 악의들. 그것들은 멈춰 선 섭을 경멸하듯 천천히 그리고 어떤 확고함으로 흘러갔다. 섭은 몸이 뜨거워지는 상상을 한다. 거대한 용암에 몸이 닿는 순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타올라 한 줌 연기로 사라져 버린다.


섭은 더 짙은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자신이 용암이 된 것 같은 상상을 하며 동굴 안을 천천히 걸었다. 위에서 녹아 떨어져 내린 용암들. 천장과 함께 떨어져 내리며 그곳에서 식어간 용암의 잔재들. 거대한 용암의 걸음이 느려지고 점점 수위가 낮아지며 수그러드는 모습이 눈앞에서 되살아났다. 1킬로미터를 걸어 동굴의 끝에 다다랐다. 커다란 용암 기둥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져 있었다. 거대한 용암의 사체. 용암의 비명. 용암의 절망. 섭은 오래도록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웅장한 개미집처럼 생긴 그것은 천장을 뚫고 솟아오르려는 어떤 간절한 기도처럼 높게 서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개방된 곳은 여기까지였다. 섭은 조명이 비치는 용암석주 너머의 어둠을 노려보았다. 저곳엔 무엇이 있을까. 용암의 무겁고도 확고한 발걸음은 저 깊은 어둠 속을 지나 7킬로미터를 더 나아가서야 멈췄다. 어떤 이유로 멈추었을까. 마지막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차고 단단한 돌덩어리로 변해버린 자신의 일부를 보았을 때 어떤 슬픔을 느꼈을까. 섭은 생각했다. 느리고도 짧은 생을, 온몸이 굳는 그 순간까지도 묵묵히 자신의 존재를 내려다보고 있었을 그것을. 마치 용암이 살아있기라도 한 듯 섭은 어떤 깊은 비애를 느꼈다.







small talk, [기도]


만장굴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 깜짝 놀랐다. 그곳은 내가 아는 동굴과는 달랐다. 동굴이라기보다는 터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렸다. 인위적인 힘을 빌어 만든 거대한 통로. 대형버스도 통과할 만큼 그곳은 거대했다. 당시의 나는 겁이 많았고 발을 내려놓기가 껄끄러워 누군가의 뒤에 숨어 한 발 한 발 걸어야 했다.


나이가 들어 제주도에 갔을 때 다시 한번 만장굴로 향했다. 오래 전의 공포가 나를 덮쳐오는 게 아닐까 살짝 겁이 났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같이 온 사람들과 함께 웃으며 웅장한 동굴을 구경했다. 수다를 떠는 와중에도 동굴 벽면으로 길게 이어진 유선들에 자꾸만 눈이 갔다. 용암의 길. 한발 한발 내디뎠을 길에 대해 생각했다.

                

용암석주


예전의 두려움은 사라졌지만 어떤 비애가 그 자리에 남았다. 꿀렁이며 움직였을 거대한 생에 대해 생각했다. 뜨겁게 타오르고 차갑게 식어버린 것들에 대해. 수많은 열망과 수많은 절망들에 대해.


어떤 희망은 떨어져 굳어버리고 어떤 희망은 흘러가 버린다. 그리고 어떤 희망은 하늘 위로 올라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한다. 동굴 안에 널려 있는 종유석과 석주, 석순들이 마치 인간의 복잡다단한 내면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내 안에서 들끓고 있는 열망의 이야기들은 아닐까? 동굴 입구는 검은 아가리. 벽면을 흐르는 유선의 높이들과 여기저기 기괴한 모양으로 만들어진 용암의 덩어리들은 마치 내 안에 가득한 감정의 찌꺼기들 같다.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비선형적인 은유의 조각들. 이룰 수 없는 욕망과 이루어지지 못한 갈망이 뒤엉킨 하수구.


동굴 끝에 다다르자 줄을 서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천장과 바닥이 맞닿아 기둥처럼 보이는 용암석주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며 웅성거린다. 이상하게도 그 모습들이 간절한 기도처럼 보인다. 지상의 모든 바람들이 원하는 곳으로 향하길 끝없이 갈망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나는 기쁨에 환하게 웃는 사람들을 보며 용암석주 앞으로 걸어간다. 그들이 원하는 바가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를 신들에게 온전히 가 닿기를 기도한다.




은유의 조각들은 주위에 널려 있습니다.
무언가를 보고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단어들을 입속으로 되뇌어 보세요.
생각하지 말고 단어들을, 문장들을 뱉어 보세요.
그 속에서 반짝이는 보석을 찾을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doubleb/54



https://brunch.co.kr/@doubleb/57


작가의 이전글 백선생도 구원하지 못하는 파괴 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