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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진미 Oct 12. 2019

[소스와 향신료] 그거 사봤자 결국 쓰레기일 걸?

소스와 향신료의 늪

마트에 가면 항상 소스가 쌓여 있는 곳으로 향한다. 재밌어. 온 나라의 소스와 향신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걸 보면 세계 각 국의 사람들이 저마다 뽐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잘 차려입고 으스대며 내게 자신을 사가라고 소리친다. 딜리셔스! 케리코! 쎄봉! 하우취! 에스 잇스 레카! 알로 아이크 랍!


 짜릿해. 늘 새로워. 명품관에서 백을 고르듯 소스를 신중하게 고른다. 생각 같아서는 몽땅 사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모습들. 노랗고 빨갛고 초록에 갈색에 주황색. 아, 뭐를 사지? 하나만 살 수 없어서 결국 두 개를 고른다. 그 와중에도 어느 것이 내 요리의 본질을 가려 줄 수 있을 것인지 머리를 굴린다.


"그거 살 거야?"

내가 온갖 향신료들 앞에서 서성이자 K가 조심스레 묻는다. K의 말이 무슨 뜻인 지 잘 알고 있다. '그거 사봤자 또 버릴 텐데?'라는 말이라는 걸. 나는 K를 한번 째려보고 되도록 예쁜 병을 집어 든다.


사실, 처음엔 소스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볶음요리 하나 하기 위해서 굴소스를 사야 하고 가까스로 돈가스를 튀겼더니 돈가스 소스가 없어서 또 사야 하고. 한 달에 한 번 해 먹을까 말까 한 요리를 위해 온갖 소스와 향신료를 사는 건 너무 낭비가 아닌가. 유통기한이라도 길면 모를까 잠깐 한눈을 팔고 나면 냉장고엔 한번 쓰고 뚜껑을 닫아 놓은 소스들로 넘쳐나는 것이다.


정기적으로 소스들을 버리고 요리를 하다가는 없는 걸 깨닫고 또 달려가서 같은 걸 사고, 한번 쓰고는 다시 냉장고 속에 던져 놓는다. 사고 버리고 사고 버리고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몇 년간 뜯지도 않은 채 구석에 처박혀 있는 소스들은 어떤가. 아, 수많은 소스로도 해결되지 않는 요리의 서글픔이여. 이건 저주나 마찬가지다. 아니면 나 같은 요리 바보들을 골려먹기 위한 거대 식품회사들의 농간이거나. 어쨌거나 사는 건 멈출 수 없다. 내 요리의 실체를 가릴 수 있는 손쉬운 방법임에는 틀림없으니까.





냉장고와 찬장에 들어 있는 소스와 향신료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각각의 인격을 가진 새로운 생명체로 보인다. 저것은 바로 인간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어느 것은 매번 손이 가고, 어느 것은 한두 번 쓰면 그만이다. 옷을 뻔지르르 잘 차려입은 녀석이 있는 가 하면, 보잘것없는 녀석도 있다. 어떤 녀석은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존재감도 없어서 깜빡하고 똑같은 걸 다시 사 오곤 한다.


어? 저기 저 제일 끝에 있는 애. 피시소스라고 쓰여 있는 애, 쟤가 나네? 언제 산건 지 기억도 안 나는 소스. 저걸 왜 산 거지? 내가 뭘 해 먹겠다고 피시 소스를! 아... 진짜 이건 아니다. 한식 간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무슨 동남아 음식을 해 먹겠다고 피시소스씩이나 샀단 말인가! 따지도 않은 채 유통기한이 지난 소스병을 보고 있자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언젠가 그런 소릴 들은 적이 있다. 너는 너무 과하다고. 모든 건 적당해야 하며 정량을 지켰을 때 가장 좋은 빛을 발하는 거라고 누군가 내게 말했다. 하지만 과하다고 나쁠 건 또 뭔가. 열정이 과해서 얼마나 나쁘다는 건가, 사랑이 과하다고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는가. ‘과하다’는 정도의 문제는 누가 누구의 기준으로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터무니없이 나무라는 그 사람에게 당신은 당신의 정량대로 살면 되는 거고, 다른 이들은 그들 나름의 정량이 있으니 당신이 이렇다 저렇다 할 필요는 없다고 딱 잘랐더랬다.


가끔 요리를 하다 보면 느닷없이 오래전 그 말이 생각난다. 사람에 관한 한 그것은 잘못된 말이지만 요리에 관한 한 딱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어쩌면 내가 너무 과하게 재료들을 넣고 지지고 볶고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생각해보니 나한테 음식을 잘 만들 수 있는 유전자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거 아닐까? 맛이 없진 않지만 맛이 있지 않다. 뭐랄까. 그냥 있으니까 먹는다 정도의 음식이다. 슬프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마트에 갈 때마다 소스와 향신료 구간에서 맴도는 걸까. 아, 못하니까 향신료로 승부를 보려는 심보인가? 맞는 것 같다. 좀 가릴 게 필요해. 시선을 분산시켜야 해. 화려한 뭔가가 있어야 안심이 돼. 하지만 진짜 선수들은 그렇지 않겠지.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기 위해 향신료도 최소한으로 쓸 거야. 에휴, 나는 언제쯤 소스와 향신료의 늪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말하는 동안에도 저 구석에 파슬리가 또 보이네. 파슬리는 왜 샀니? 그거 얼마나 쓴다고. 웬일! 꺼내보니 이건 파슬리가 아니야. 은행나뭇잎 갈아 넣은 거야. 누렇게 떴어... 샛노래. 이걸 김치찌개에 뿌려 먹을 거냐, 된장찌개에 뿌려 먹을 거냐. 어휴, 줄줄이 많기도 하다. 맙소사 양고기 한번 해먹은 적 없는데 큐민이라니.. 게다가 바질가루에 오레가노까지.


변한 재료들을 볼 때마다 이렇듯 한 번씩 깊은 자책감에 빠지지만 어쩔 수 없다. 그건 마치 화려한 장신구를 사는 기분이거든. 내 보잘것없는 요리에 걸칠 반짝반짝한 장신구들 말이다. 아직은 포기 못하겠다. 소스와 향신료들 없이 멋진 요리가 완성되는 날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아직, 그러니까 저것들은 언젠가 쓸모가 있을 거야. 사 두면 다 쓸모가 생기는 법이야. 내가 나를 조용히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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