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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진미 Oct 12. 2019

[열무] 그는 열무를 뽑아 내게 건넸다

'지겨워...'  20대의 철없던 나는 구불구불 차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시골이 불만이었다. 서울을 등지고 시골로 내려 간 부모님이야 당신들 마음이니 상관할 바 아니지만, 한창 놀고 싶은 20대는 주말의 시골구석이 지겨웠다. 일주일에 한 번씩 주말농장처럼 서울에 사는 식구들은 시골로 향했다. 


부모님은 육체노동으로 얻은 병 때문에 휴양 겸 시골로 내려가셨지만 그곳에서조차 쉬지 않으셨다. 봄에는 감자, 옥수수, 열무, 고추, 가지를 심었고 여름에는 들깨와 배추, 무, 고구마를 심었다. 거기다가 여러 과일들까지. 고랑을 파고, 씨를 뿌리고, 자라면 그때그때마다 벌레를 잡아주고, 약을 주고, 지지대를 세우고, 거름에 물까지 퍼 날라야 했다. 해가 뜨거우면 뜨거워서, 비가 많이 오면 많이 와서 걱정이었다.


봄이 지나 꽃이 피고 늦여름에 열매를 맺어 거두고 다시 가을 겨울에 거두는 작물들까지. 그 모든 게 내게는 끔찍한 노동일뿐이었다. 내가 더럽고 냄새나는 땅이나 파고 있는 이 순간에도 친구들은 잘 차려입고 홍대나 압구정 거리를 걷고 있을 게 뻔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자꾸만 화가 났고 지겹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어느 순간부터 언니와 오빠의 가족들이 충청도의 백야리로 향할 때도 나는 가지 않았다. 억울했고 짜증이 났다. 회사에서 밤샘 작업이 많다고 거짓말을 하며 주말마다 홀로 빠져 자유를 만끽했다. 철이 없었다.


싹을 심고 물을 주는 오빠와 k 씨


"열무 먹고 싶다."

"그래? 열무김치 레시피 있던데 내가 해볼까?"

"아니 열무김치 말고 열무."

"응?"

"열무가 얼마나 야들야들하고 맛있는지 자기는 모르지?"

"김치 할 때 옆에서 먹어는 봤지."

"그런 거 말고. 밭에서 막 뽑은 거. 쑥 뽑은 열무의 흙을 탈탈 털면 뽀얗고 어린 열무가 나와. 엄청 이뻐."

"장인어른 생각 나는 구나?"

"우유처럼 뽀얀 열무를 한입에 깨물어 먹으면 얼마나 단지. 밭에서 먹어 본 사람만이 알지."



기일이 다가오고 있어서 그런지 며칠 전부터 아빠 생각이 났다. 우울한 기분도 없앨 겸, 거실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는데 가늘고 흰 구름이 느닷없이 열무 모양으로 보이는 게 아닌가. 뒤이어 흙이 묻은 열무를 손으로 탁탁 털어 나에게 건네던 아빠의 두툼한 손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그날도 입이 댓 발 나온 채로 밭을 고르고 있었다. '진짜 싫어. 내가 지금 이런 거나 해야 하냐고.' 하기 싫어서 대충 땅을 탁탁 내리찍으며 짜증을 내고 있는데 아빠가 오는 게 보였다. 아직 덜 여문 열무들을 둘러보던 아빠는 허리를 숙이고 푸른 열무의 청을 쑥 뽑아 올렸다. 더러운 흙을 잔뜩 끌어안고 뽑혀 나온 검지 손가락 만한 어린 열무를 와작 베어 무는 아빠에게 씻지도 않았는데 그걸 왜 먹냐고 버럭 소리쳤다. 그러자 아빠는 하나를 더 뽑더니 뿌리에 묻어있는 흙을 탈탈 털어 나에게 건넸다. 


"싫어, 더러워."

"괜찮아. 다 털었어. 먹어 봐, 지금 먹어야 맛있는 거야."


코앞에 들이 민 열무가 못마땅해 인상을 구기고 있는데 순간 흰 열무에서 기분 좋은 향이 풍겼다. 이게 무슨 냄새일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빠는 내 입에 열무를 쏙 집어넣었고 나는 못 이기는 척 와작와작 열무를 씹었다. "무가 무지, 무슨 맛이 있어!" 괜히 소리쳤지만 뒤이어 깜짝 놀랄 맛을 느꼈다. 내가 알고 있는 무에서 느껴 본 적 없던 신선한 향, 단단하지 않고 약간의 찰기가 느껴지는 여린 열무의 식감. 씹으면 씹을수록 느껴지던 단 맛과 기분 좋은 향이 나를 들뜨게 했다. 내가 뱉지 않고 꼭꼭 씹어먹는 걸 본 아빠는 재밌다는 듯 푸하하, 웃으며 내 머리를 콩 때렸다.


아빠의 말이 맞았다. 생각해보면 뭐든 그 자리에서 먹었던 것들이 제일 맛있었다. 구불구불 밉게 자란 오이를 똑 따서 와작 씹으면 물을 한잔 마시는 것보다 더 시원했지. 노랗고 빨갛게 익은 방울토마토는 설탕보다 달았다. 나는 끝내 거부했지만 엄마는 보랏빛 가지도 따서 한입 먹기도 했었지. 바람이 불면 내 주위로 화르륵 풍기던 깻잎의 향. 노란 참외를 껍질째 씹어먹어도 껍질의 질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보드라웠다. 농사꾼이 아니라면 절대 느낄 수 없는 새로운 맛의 경험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소중한 땅의 산물을 바라보는 그들의 마음을. 하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소중한 것들을 함부로 대하곤 하지. 나도 그랬고. 비닐에 담아온 그대로 방치하다가 썩으면 버리고, 먹기 싫으니 버리고, 비싸지 않으니 쉬이 버리고. 언제 어디서든 마트만 가면 깨끗하게 손질된 것들이 넘쳐나니까. 그것들은 별것 아닌 것들이니까.


오래전에 느꼈던 열무의 맛과 향이었지만 아직도 그날의 순간들이 사진처럼 머릿속에 박혀 있다. 나를 보고 푸하하 웃던 아빠의 웃음도. 그때는 몰랐지만 아마 아빠는 열무를 씹고 있던 나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겠지. '아빠 말이 무슨 말인지 이제 알겠어? 우리 막내는 바보네!'



"해 줘."

"열무?"

"열무김치 해줘. 먹고 싶어."

"그래. 음... 굵은소금 아직 남았지? 마늘도 있고, 파는 얼마 없으니까 열무랑 파만 사 오면 되겠다."

"자신 있나?"

"물론! 장인어른의 열무보다 더 맛있을 자신은 없지."


k는 늘어져 있는 나를 끌고 시장으로 향했다. 열무와 파를 사 가지고 오다가 떡볶이집에서 어묵이랑 떡볶이를 나눠 먹으며 우리는 각자 생각에 빠졌지. 그 여름의 열무와, 담가야 할 열무김치와, 아름다운 계절과, 소중한 농작물들의 쓰임과, 그 맛에 대해. 




어랏, 이런저런 말이 길어지다 보니 열무에 대해서만 쓰고 정작 열무김치에 대한 글은 쓰지 못했네. 다음엔 요리 천재 k가 만들어준 열무김치에 대해 써보겠다.




https://brunch.co.kr/@doubleb/88


https://brunch.co.kr/@doubleb/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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