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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진미 Jan 07. 2019

괴로움을 잊게 해 준 것들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아무것도 읽지 못하는 우울한 날들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나를 기쁘게 해 준 것들은 있었다. 바로 만화 [술 한잔 인생 한 입]과 [바 레몬하트], 그리고 [심야식당]과 이토 준지의 기괴한 공포물들. 어쩌다 보니 다 일본 만화들이지만 저 만화들을 한 권 한 권 읽으며 슬픈 마음을 달랬던 건 사실이다. 다른 만화들이야 이해가 되지만 이토 준지의 만화로 슬픔을 달랬다고 하면 어쩐지 이상한 사람으로 비치는 건 아닐까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게 그러니까 이토 준지의 만화는 우울을 달래기엔 좀 거리가 있는 게 사실이니까.


이토 준지의 만화는 뭐랄까. 기괴하면서 그로테스크한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본다고 한다면 너무갔나? 어쨌거나 내 마음속에서 꿈틀대는 증오와 분노에 스스로가 휩싸이지 않도록 시선을 분산시켜 준 책이기도 하다. 이토 준지의 구역질 나는 화풍을 들여다보고 들여다보고 했던 순간에는 내 속의 어둠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 것은 그의 것에 견줄 바가 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혹시라도 아이가 보게 될까 두려워 책상 제일 꼭대기에 책배가 보이도록 뒤집어 꽂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이가 잠들면 꺼내서 읽고 아이가 깨면 보이지 않게 치워두는 행위가 마치 금서의 유혹처럼 달콤했다.


뭐, [심야식당]이야 워낙 유명하니 말할 필요도 없을 테고...(특히 1권과 2권을 좋아한다. 김현철의 음악 중 명반인 1집과 2집만 좋아하는 것처럼.) [술 한잔 인생 한입]의 주인공 소다츠와 [바 레몬하트]의 바텐더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러니까 그들은 나의 롤모델인 것이다. 사람이 한번 살면 저들처럼 멋있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소다츠는 온 인생을 자신을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 맛있는 술과 안주를 먹기 위해서라면 그는 연애도 마다하고 불필요한 단체모임에서도 자유롭게 빠지길 자처한다. 때로는 홀로 일본주에 안주를 만들어 먹으며 기쁨을 만끽하고 때로는 모두와 함께 해넘이 국수를 먹으며 충만한 시간을 보낸다. 레몬하트의 주인인 마스터는 어떠한가. 그는 소박한 바를 하고 있으면서도 행복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간다. 손님들이 가져다주는 술을 함께 마시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아껴둔 코냑을 손님들을 위해 슬며시 내어 준다. 그 환한 얼굴로 싱글몰트 위스키를 단숨에 쯉- 마시는 모습이라니. 아아. 나는 소다츠와 마스터를 보며 저들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자신의 시간대로. 자신만의 속도로 현재를 살아가는 자들의 삶은 봐도 봐도 아름답다.


말이나와서 얘긴데 영화도 빼놓을 수 없다. 천재와 바보는 종이 한 장 차이랬나? [천국보다 낯선]이나 [스모크] 같은 훌륭한 영화들을 좋아하지만, 나는 작정하고 만든 B급 영화들도 그에 못지않게 좋아한다.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 것이 천재적인 것이고 어느 것이 우스운 것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니까. 어머나, 그래서 나는 B writer 인가 봐. 주성치의 영화들은 B급인가 싶게 대단한 작품들이다. 그중 [쿵푸허슬]은 봐도 봐도 명작. B급 좀비 영화들도 내 즐거움 중 하나이고, 휴 잭맨과 케이트 윈슬렛 등 유명 영화배우들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무비43]은 보자마자 홀딱 반해버렸다. 너무 좋아서 눈이 번쩍 뜨였는데 영화평을 적어 놓은 여러 명의 사람들이 나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누군가 이런 댓글을 달아놓은 걸 본 적이 있다. '이게 제정신인 사람이 보는 거 맞냐?' 


무서운 건 싫지만 잔인한 슬레셔 영화들은 또 눈을 반쯤 감고 끝까지 본다. 인정한다. 나도 내가 제정신인가 싶을 때가 가끔 있다. 요즘은 얼마 전에 본 [브루고뉴에서 찾은 내 인생]이란 영화에 빠져 있다. 기분을 달래려고 누워서 플레이를 시작했는데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벌떡 일어나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영화가 시작하며 흐르는 음악과 미술작품을 보고 있는 듯한 영상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어머 이건 딱 내 스타일이네! 어느새 우울한 감정들은 사라지고 두근거리는 심장만이 존재했다. 최근 몇 년간 본 영화 중 영상과 음악이 가장 조화롭고 아름다운 영화였다. 새로울 것 없는 내용이지만 따뜻한 관계들도 나쁘지 않았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브루고뉴에서 찾은 내 인생] OST를 연속해서 듣고 있는 중이다. Red Red Red는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이렇듯 좋아하는 것들을 적고 있으려니 우울한 감정들이 내게 존재했었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 역시 사람은 좋은 걸 보고 좋은 걸 듣고 좋은 생각을 많이 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조금은 뻔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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