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아 교정을 시작했다. 보름째 전혀 씹질 못하고 있다. 즉석밥으로 대충 물에 풀어 넣고 믹서기로 갈아서라도 먹으려고 했다. 너무 많이 갈아서인지 김장할 때 쓰는 풀처럼 돼버렸다. 디스토피아를 다룬 SF영화의 식량 같기도 하다.
그렇게 매번 억지로 배를 채운다. 정말 만족스러운 식사 후에는, 별다른 것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쉽게도 그 반대도 성립한다는 걸 여실히 느꼈다. 정말 불만족스러운 식사 후에는,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쌓아놓은 책과 영화, 드라마를 소비하기 시작했다. 티브이는 술술 들어갔다. 쉽게 몰입했고, 일시정지 없이 끝을 보였다. 책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처음부터 내 취향의 책들만 샀었기 때문에, 걸릴 것이 없었다.
이 책이란 놈은 참 재밌다. 소비자가 소비 속도를 좀 더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는 콘텐츠다. 입맛에 맞는다고 느끼면, 시원한 목 넘김으로 페이지가 꿀떡꿀떡 넘어가곤 한다. 같은 책을 10분 만에 읽어버리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한 달에 걸쳐 오래오래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혹자는 속독을 자랑처럼 여기기도 한다. 사실 내가 그 혹자다. 어려운 이름의 등장인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소설은 금방금방 읽곤 한다. 그래서인지 쌓아놓은 책들을 다 읽은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넓지 않은 방을 뒤져보니 숨겨진 책이 더 있었다. 텀블벅에서 홀린 듯이 후원했던 두 월북작가의 수필집이었다. 여간 반갑지 않았다. 이래서 텀블벅이 좋다. 갖고 싶지만 하등 필요하지 않은 선물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받을 수 있다.
읽고 있자니 뻑뻑했다. 그 당시의 문학은 대개 나에게 그랬다. 말맛은 있지만 어휘가 참 낯설다. 문맥으로 어렴풋이 뜻을 파악하다가도, 결국 각주나 사전을 찾아보게 된다. 하지만 또 같은 작가의 작품을 계속 읽고 있노라면, 금방 적응되기도 했다. 점점 눈이 뜨이는 전공 수업의 원서 같은 느낌이다.
그 뻑뻑한 글을 곱씹었다. 곱씹지 않으면 넘길 수 없었다. 마치 덜 불린 보리로 지은 밥 같았다. 다행히도 씹을 때마다 다른 맛이 났다. 톡톡 터지는 맛. 구수한 맛. 달콤한 맛. 최근에 겪지 못한 맛이었다. 연신 페이지를 앞으로 넘기며 다른 맛을 느끼곤 했다.
최근 읽었던 책은 백미로 지은 진밥이었다. 그다지 씹지 않아도 모든 맛이 한 번에 느껴지며 목구멍으로 훌렁훌렁 넘어가는 그 진밥. 내가 제일 좋아하는 진밥. 그 와중에 보리밥이 숨어 있었다. 꼭꼭 씹어서 즐길 수 있는 별미가 있었다.
아까 카페에서 케이크를 주문할 때도, 어떤 게 제일 부드럽냐고 물어야 했다. 슬프다. 대신 책은 별미로 읽기로 했다. 입은 허여멀건한 죽을 먹겠지만, 눈은 꼬들꼬들한 보리밥을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