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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블블랙 Apr 15. 2021

물 많은 라면과 불쾌한 포만감

집에 라면이 떨어졌다. 정확히는 당장 주문하지 않으면 모레는 야식으로 라면을 먹지 못할 것 같다.

핸드폰을 꺼내 평소에 먹던 진라면을 장바구니에 넣는다. 아무래도 어떤 계기로 인해 신라면을 더는 먹지 않게 된 이상, 대체품으로는 진라면만 한 것이 없다. 둥근 냄비에 쏙 들어가는 원형의 면을 대신할 수 없어도 그럭저럭 만족한다.


관련 상품에 여러 라면이 뜬다. 흔하디 흔한 라면들이지만 그중에 삼양라면을 본 순간 갑자기 예전 생각이 났다. 무슨 용기에서인지 한 봉지를 장바구니에 넣어버렸다. 대놓고 꺼리진 않았지만 결국 내 돈 주고 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아직도 내가 제일 사랑하는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이던 때, 참 곤궁했었다. 그래도 집에 가면 밥은 먹고 잠은 잘 수 있잖니-라는 흔하디 흔한 말이 그저 부러울 수밖에 없던 나는 학생도 뭣도 아닌 상태로 학교 앞을 떠돌고 있었다. 붙임성이 없다고 하기엔 이상할 정도로 어지간한 아르바이트에서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쫓겨나 간혹 생기는 단기 알바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내가 간절히 바랐던 곳은 한 달에 27만 원 하는 모 고시원이었다.


그 고시원은 라면과 밥이 공짜였다. 한 끼에 3개씩 끓여 먹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라면은 활용도가 높다. 그냥 부숴 먹어도, 뽀글이로 먹어도 맛있다.


더는 며칠씩이라도 신세 질 방이 없어지기 시작할 때부터, 난 그 고시원을 노리고 있었다. 라면만 충분히 먹을 수 있다면 바랄 게 없었다.


단기 알바로 25만 원을 모았다. 하지만 보증금 3만 원을 포함한 30만 원에는 부족했다. 그 당시에는 너무 큰돈이었다. 돈을 구할 곳도 없었다. 그 고시원이 언제 만실이 될지도 몰랐다. 그때 사흘짜리 의자 설치 단기 알바 일이 들어왔다. 일산 킨텍스에 설치로 하루, 근처 다른 행사 설치/철수 하루, 다시 일산 킨텍스 철수로 하루. 숙식도 해결되는 아주 반가운 일이었다. 총 13만 5천 원을 받을 좋은 기회였다. 나만의 작은 보금자리를 얻을 생각에 그 사흘 정말 금방 지나갔다. 신병 위로휴가와 비슷한 속도였던 듯싶다.


그 일을 끝내고 라면 고시원에 바로 전화를 했다. 그 사이에 만실이 되었다. 암담했다. 40만 원 남짓의 돈이었지만 그곳에 갈 수가 없었다. 당장 갈 곳이 없던 나는 그나마 저렴했던 20만 원짜리 고시원에 자리를 잡았다. 하루 두 끼를 학교의 기숙사 식당에서 해결하며 계속 버텼다. 단기 알바는 두세 번 정도 들어왔던 것 같다. 버틴 것 외에는 한 게 없는 한 달이 금방 지나갔다. 20만 3천 얼마가 남았던 거로 기억한다. 한 달 방세를 내고 나니 정말 손에 쥔 게 없었다.



걸어가기엔 좀 멀었던 대형 마트에 갔다. 2천 원에 삼양라면 다섯 봉들을 팔았다. 냉큼 집었다. 남은 천 원짜리 한 장과 동전 몇 개는 언제 생길지도 모르는 단기 알바를 하러 가기 위한 차비로 남겨놓아야 했다.


그 고시원은 그래도 밥은 줬었다. 달걀을 부쳐 먹으라고 소금도 있었다.

내 물컵이자 밥그릇인 냉면 그릇에 밥을 가득 담았다. 냄비에 물을 과할 정도로 담고, 라면 한 봉지를 탈탈 털었다. 그리고 소금으로 추가 간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연한 삼양라면의 국물의 색은 더 연해졌다. 냉면 그릇에 담긴 밥 위에 라면을 부었다. 그 과정은 당시에도 너무 부끄러웠다. 뜨거운 줄도 모르고 묵직한 냉면 그릇을 조심히 들고 방으로 도망치듯 들어왔다. 한 끼에 먹기에는 다소 많았지만, 꾸역꾸역 다 먹었다. 하루에 유일한 한 끼였으니까.


그렇게 5일을 버텼다. 그나마도 없어지고 나선 밥만 퍼왔다. 밥이 식으면 단맛이 생긴다는 걸 알던 나는 퍼온 밥을 두어 시간 쳐다보다 먹었다. 며칠을 그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서 논산에 갔고, 입소대대의 밥이 정말 맛있던 기억만 난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 한다는 내 습성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안정적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지만, 몇 년간은 공깃밥 무료라는 문구와 주방 밖으로 나온 밥솥이 있는 식당에 들어갈 때면 불쾌한 포만감을 안고 나오곤 했다.


이틀 후면 삼양라면이 올 것이다.


먹기 좀 그렇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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