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블블랙 Apr 19. 2021

볶지 않은 볶음밥

계란찜은 쪄야 하고, 장조림도 졸여야 한다. 소금구이도 구워야 하고, 볶음밥 또한 볶아야 한다. 아. 닭볶음탕은 끓이지 참.

어찌 되었건, 볶음밥은 볶아야 한다. 하지만 그걸 할 수 없었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라 가벼이 글을 적어 본다.


월급이 120만 원이라고 했다. 우대 사항으로 내가 그나마 잘할 수 있는 일들이 적혀 있었고, 난 선택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다지 좋은 조건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계약서에 대충 서명을 하고 나서 난 소같이 일했다. 야근도 했었다. 추가 수당은 안 나와도 저녁값은 주니까.


월급날 들어온 금액은 76만 원이었다. 월급 주는 분에게 여쭤보니 수습 기간이어서 그랬다고 했다. 집에 가서 계약서를 보니 수습 기간은 3개월이며, 해당 기간 동안은 급여의 70%만 지급된다고 적혀 있었다.

뭔가 표현할 수가 없었다. 첫 월급이 들어오기까지 생활하기 위해 주변에게 빌린 돈과 밀린 핸드폰 요금을 제하면 되려 모자랐다.


당시 친구가 아르바이트하던 카페에 놀러 갔다. 신세 한탄 겸, 빌린 돈에 대해서 상환이 지연됨을 실토할 겸. 크지 않은 금액이었기에 흔쾌히 상황을 이해해 주었다.

밥이나 먹고 가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카페에서 밥을? 얼마 지나지 않아 고슬고슬해 보이는 볶음밥을 갖고 나왔다. 단무지나 김치를 먹지 않는 나를 잘 알고 있기에, 쟁반도 없이 그릇과 숟가락만 들고 나왔다.


사실 그 친구 알바가 끝나기를 기다려 밥을 얻어먹기로 마음을 먹고 만난 거라 난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때 급히 밥을 처넣었던 건 입이 아니라 주둥이였던 것 같다. 발우공양을 카페에서 해버렸다. 친구는 뭔지 모를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몸이 진정된 상태에서 친구와 이어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방금의 볶음밥 이야기도. 그 볶음밥 처음 보냐고 친구가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왜 처음 보냐고 했다. 갑자기 당황스러웠다. 왜 처음 보냐니. PC방에서 파는 볶음밥도 그 볶음밥이라고 친구가 알려주었다. PC방에서 볶음밥을 왜 먹어. 그럴 돈이 어딨어.


중요한 건 그 볶음밥의 대중성이 아니었다. 내가 먹은 햄야채 볶음밥의 가격은 채 천원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거다 싶었다. 내 길은 이거구나.

그때부터는 친구와의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저 집에 빨리 가서 그 볶음밥을 회사로 주문하고 싶었다. 물론 최저가로.

전자레인지 조리가 가능했다. 집 어딘가에 있는 전자레인지 조리가 가능한 밀폐용기를 찾아서 가방에 곱게 넣었다.


볶음밥들을 담은 스티로폼 박스는 막상 사무실에서 받기에는 조금 민망했다. 어차피 아무도 쓰지 않는 탕비실 냉동고였지만, 급하게 볶음밥들을 쑤셔 넣었다.

점심시간에 다들 밥을 먹으러 나가고, 난 가방에서 용기를 꺼내 탕비실로 향했다. 햄야채 볶음밥 1개를 꺼내 용기에 넣고 전자레인지 3분을 눌렀다. 1분이 지나자 그때 그 향이 나오기 시작했다.


멍청하게도 숟가락 생각을 못해서 구석구석 뒤져 일회용 숟가락을 찾아야 했지만, 그 날 식사는 성공적이었다. 카페에서 먹었던 것처럼 기름지지는 않았지만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수습 기간이 끝나고 나서도 한 3개월 정도는 볶지 않은 볶음밥 신세를 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의외로 그 볶음밥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은 하찮은 이유였다. 밀폐용기에 그 볶음밥의 찌꺼기가 제대로 닦이지 않은 탓인지, 무의식적으로 볶음밥을 먹다가 역겨운 냄새가 올라와서 토를 해버렸다. 매번 세제로 박박 닦긴 했는데, 가끔은 집에 갖고 가서 뜨거운 물로 깨끗이 씻겨야 했었나 보다. 그 이후로는 그 볶음밥을 보기만 해도 역겨워서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지금은 카페에서, PC방에서도 볶음밥을 시켜먹을 이유가 없다. 아마 그 냉동 볶음밥의 맛은 내가 작정하지 않는 이상 보기 힘들 것 같다. 가끔 궁금하긴 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A대학교의 일부 빈곤한 학우님들에게 공유드립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