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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블블랙 Apr 21. 2021

편히 울 수 없던 사람들

예전에 만나던 분이 있었다. 형제자매가 없던 나에게는 누나 같은 사람이었고, 회사 생활을 처음 하는 나에게는 선배 같은 사람이었다.

당시 나도, 그분도 풍요롭지 않았다. 뭐 맘만 먹으면 여러 가지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리하게 넣기 시작한 적금은 내게 처음으로 '돈이 모인다'는 재미를 주었다. 내가 기특하게도 스스로 거부한 방만 섞인 풍요는, 어쩐지 다시는 나를 유혹하지 않았다.


어, 잠깐 단어 선정을 고민 중이다. 서로 좋아서 만나는 두 사람이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통은 데이트라고 한다. 근데 막상 데이트라 쓰려고 하니 그때 그 동네에서 시간을 보냈던 것들이 지금에도, 당시 기준에도 너무 보잘것없다. 근데 다른 어휘가 없다. 그냥 데이트라고 해야겠다.


대부분의 데이트는 내가 컵밥을 사는 것으로 시작했다. 나는 역 입구를 나와서, 매번 가던 컵밥집에 갔다. 4개의 컵밥집이 모여있던 그 골목에서 내가 가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예전에 컵밥을 기다리면서 그 집 사장님이 조리하시는 모습을 보았었는데, 김치를 볶을 때 폭포처럼 쏟아붓던 설탕과 갈색 소스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어쩐지 맛있더라니. 그 골목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보았을 모습이지만, 그 모습을 본 나는 뭔가 그 사장님과의 비밀이 생긴 느낌이 있었다.

무슨 메뉴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우리의 메뉴는 고정이었다. 스팸 어쩌고 컵밥과 치즈 어쩌고 컵밥. 근데 어차피 그 맛은 거기서 거기다. 볶은 김치와 계란 프라이, 김가루가 올려져 있으면 뭐가 올라와도 그 맛이다. 맛있는 맛. 맛이 없을 수 없는 맛. 내가 지금만큼만 현명했다면, 가장 기본 메뉴를 먹었을 것 같다. 그러다가 하루쯤은 스페셜한 컵밥을 먹었겠지.


컵밥이 담긴 봉지를 한 손에 들고 그분의 집으로 가는 길은 항상 다채로웠다. 좁은 인도에서는 책은 들고 있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학생 같은 사람들이 나를 앞서가고 지나쳤다. 골목 어귀에서는 금연이라는 표지판 아래에서 따로, 또 같이 사람들이 한숨을 뱉어냈다. 길가의 노점상에서는 팬케이크, 닭꼬치, 쌀국수, 떡볶이 등이 향기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분은 옥탑방을 선택했었다. 옥탑방은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곳이지만 한 번은 살아보고 싶다며. 다른 원인도 있었겠지만 포장하기엔 낭만적인 이유만으로도 충분했겠지. 화분이 놓여있던 좁고 가파른 계단은 유난히 오르기 힘들었다. 나 왔어.라는 말을 하고 노크 없이 문을 열면 그분이 말간 웃음으로 반겨주었다.

넓지 않지만 굳이 넓을 필요도 없었던 그 방은 언제나 따뜻했다. 먼저 다가와 막 안기거나 그러진 않았지만 내가 안아도 몸을 비틀어 피하진 않던 고양이도 두 마리 있었다. 그분과 컵밥을 각자 맛있게 먹고, 또 각자 할 일을 하곤 했다. 가끔은 컴퓨터로 영화를 같이 보기도 하고,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사 온 책을 보기도 했다. 게임을 하기도 하고, 마주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사실 뭘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같은 공간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다.

간신히 다음 날 출근에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까지만 시간을 같이 보내고 길을 돌아와 집으로 가는 것이 데이트의 마무리였다. 궁핍한 와중에도 그저 좋기만 한 나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아쉬움을 갖고 그분의 집에서 지하철역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떤 여자가 소리 내어 울면서 나를 앞질러 갔다. 사람이 울고 싶을 때도 있는 거고, 울고 싶을 때 울 수도 있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냥 걸었다. 머지않아 또 다른 여자가 울면서 빠른 걸음으로 나를 지나쳐갔다. 지하철역까지 끽해봐야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는데, 5명의 우는 사람들을 길거리에서 보았다. 다들 공통점이 있었다. 누구 하나 옆에서 위로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두 발은 바삐 걷고 있었다.

굳이 검색해보지 않아도 무슨 일이었는지는 짐작이 가능했다. 지방직인지 국가직인지는 모르겠지만, 뭐가 중요하겠어. 아마 자신이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었겠지. 주변에 워낙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나 또한 소싯적에 재정국어 몇 페이지 정도는 읽었던 터라 그냥 그러려니 했다.


집에 도착해 누워서 생각해보니 조금 이상했다. 나였다면 아마 다르게 그 슬픔을 위로했을 것이었다. 당장의 그 먹먹함은 잠시 마음속에 묻었다가 두꺼비 한 두 마리와 친구 두엇이 있는 고즈넉한 장소에서 가서야 괴로움을 토해내지 않았을까 싶었다.

뭔가 나도 사회에 편입됐다는 오만함으로, 그때는 여러 생각을 했었다. 그들은 왜 공무원 시험 외에 다른 길을 택하지 않는 거지? 역시 내가 잘하고 있는 거야. 공무원 시험 같은 거 일찍 포기하길 잘했어. 에이 바보들. 돌이켜보면 무책임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은 조금 나이를 먹은 건지 다행히도 저런 무례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럴 여유가 없는 걸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객관적으로 과거의 감상을 배제하고 돌이켜봐도, 확실한 건 그들은 우는 것조차 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패를 겪은 마음을 드러내는 것조차도 자유롭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답답할 뿐이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걸 알기에 마음속에 함부로 질문조차 가질 수 없는 지금의 나도 답답하고, 육교가 없어지고 노점상들이 깔끔히 정리된 것 외에는 바뀐 것이 없는 지금의 그 동네도 답답하다.


그분이 가끔 좋은 소식을 전해줄 때면 그 동네에서의 힘들지만 행복했던 때가 잔잔히 그려진다. 그리고 그 배경엔 그들이 우두커니 서서 울고 있다.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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