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성인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난 일이 필요했다. 추가로 잘 곳도 필요했다. 아르바이트 사이트에서 숙식제공이라는 키워드를 포함해서 검색했다. 같은 시지만 생소한 동네에 일자리가 있었다. 시스템 동바리. 주고받은 문자 몇 번에 내 채용은 결정되었다. 반년 정도 지나 그곳을 나오게 되었을 때까지도, 계약서 같은 건 쓰지 않았었다.
첫 일주일은 너무나 힘들었다. 일을 시작한 계절이 겨울이었던 탓에, 새벽은 거의 밤이나 진배없었다. 매일 어딘지 모를 현장에 끌려가 처음 들어보는 용어와 마찬가지로 처음 들어보지만 뉘앙스로 욕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던 외침 속에서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다.
한 달 정도 지나자 어찌어찌할만하게 되었다. 물론 기존 사람들이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겠지만, 내가 느끼기에 말이다. 비몽사몽 한 와중에도 안전화, 하이바, 조끼, 각반. 그리고 장갑 두 종류를 빠짐없이 잘 챙겨서 무리에 합류할 수 있었고 900과 1500이 어느 정도의 길이인지 눈대중으로 바로바로 알 수도 있었다. 현장에서는 단위로 cm를 쓰지 않고 mm를 쓴다.
그때부터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현장에서는 거칠고 사납기 그지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일이 끝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나 가끔은 술을 곁들이는 저녁 자리에서는 그저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분이 한 분 있다.
그분은 나와 엇비슷한 시기에 합류한 분이었다. 몸 쓰는 일은 다양하게 하셨지만 이 일은 처음이라고 했다. 난 나이가 어리다 보니 일이 미숙해도 그러려니 했던 것 같지만, 쉰 남짓 되는 나이에 떨어지는 퍼포먼스를 꼴 보기 싫었던 건지 그분에게는 운전이라는 추가 임무가 주어졌다. 그분도 '38선 이남으로는 다 꿰고 있다'라고 했다. 말마따나 어느 현장으로 가든 운전이 거침이 없었다. 수더분한 성격, 퉁퉁했던 외모와 합쳐져 네비 + 저팔계 = 네팔 형님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별명으로 불리셨었다. 내 전공을 듣고는 진지한 얼굴로 얼른 정신 차리고 선생님 준비를 하라고 하시기도 했었다.
그 사람들은 정말 다양했다. 군대도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만 나이가 다들 어리다 보니 그 경험이나 굴곡이 길지는 않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나이도 다양한지라, 모든 것이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해병대를 갓 전역한 사람. 체육 교사를 꿈꾸었지만 임용고시에 매번 탈락한 사람. 세무사 1차를 붙고 잠시 숨 고르기를 한다는 사람. 다단계에 들어갔다가 실패한 사람. 닥터피시 사업을 하다 망한 사람. 네팔 형님. 그분은 이따금 당신의 아들 이야기를 할 뿐, 당신 본인의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어느 봄날 오후부터 비가 세차게 내려 오래간만에 얼큰하게 술자리를 가질 때가 돼서야, 어렴풋이 전과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사실 그때 더 놀랐던 건 그분에게 전과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듣고 무덤덤했던 사람들이었다.
천안 쪽으로 일을 나갈 때였다. 여느 현장과 비슷하게 현장 맞은편에 함바집이 있고, 그 옆에 주차장이 있었다. 일 끝나고 우리 7명은 승합차 뒤에 장비들을 던져놓고 함바집으로 향했다. 오늘 메뉴는 무난한 제육인 듯했다.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두루치기에 가까웠다. 껍데기와 비계, 살코기를 가리지 않고 꽤나 매콤하게 볶아낸 것이 밥반찬이라기보다는 소주를 강요하는 안주였다. 당시에도 술을 즐기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이건 소주와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인생 선배들은 빨랐다. 날렵하던 세무사 형님이 한 손에 두 병씩. 소주 네 병을 들고 왔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소주잔을 채우고 비웠다. 즐겁지도 무겁지도 않은 분위기였다. 의당 그래야만 하는, 마치 밥을 먹는 듯한 분위기였다. 숙소 근처가 아닌 곳에서 이렇게 모두가 술을 먹던 적은 없던 터라 다소 생소했다. 하지만 나만 생소한 듯, 다들 마치 밥 한 술에 국물을 떠먹듯 소주잔을 비웠다. 기척 없이 소주병은 늘어만 갔다.
조금은 유별났던 저녁을 치르고 난 후, 담배 피우는 시간은 평소보다 요란했었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그럼 운전은? 7명 모두가 술을 먹었는데? 네팔 형님도 이미 당연하게도 기분이 한 껏 좋아진 상태였었다.
설마 천안에서 수원까지 대리를 부르나? 생각을 미처 채 끝내기도 전에 다들 차에 타고 있었다. 마치 술은 마시지도 않았다는 듯이. 네팔 형님도 당신의 그 자리, 운전석에 자연스럽게 올라타셨다.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오기 시작하자 난 급격하게 무서워졌다. 머지않아 사람들은 곯아떨어졌다. 내가 있던 곳에서는 운전석이 보이지 않았다.
음주 단속에 걸리면 어떡하지. 아.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분은 운전을 잘했다. 그 사람들 사이에서 잘하는 운전의 기준은 빠른 이동이었다. 이건 생존의 문제였다. 내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필사적으로 운전석을 보려고 했다. 그런데 만약에 졸고 계시다면? 내가 뭘 할 수 있지? 그 모습을 보는 것조차 무서워졌었다. 아니 그것보다 왜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지금 7명의 목숨을 담보로 음주운전을 하고 있는데. 고속도로를 쌩쌩 달리고 있는데. 어떻게 다들 맘 편하게 잘 수가 있는 거지? 온갖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혹시 모를 충격에 대비해 손잡이를 꼭 잡고 있는 것 밖에 없었다. 눈을 감고 있을 수도 없었다. 행여 그 속도가 느껴질까 창 밖을 볼 수도 없었다.
감속을 하고 커브를 도는 것이 몸으로 느껴지고서야, 숙소 근처로 온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분은 운전을 잘했다. 아무런 문제 없이 주차까지 완벽히 끝났다. 다들 아무 일 없는 듯 숙소로 들어갔다.
나도 그 무리에 같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이 건설현장 일이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위험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빠루나 망치가 아닌 키보드와 마우스로 일하기 시작하고부터는 이런 일을 겪지 않았다. 다만 아직도 식당에서 안전모를 옆에 두고 소주잔을 기울이는 분들을 볼 때면, 내 인생 가장 무력하게 공포스러웠던 때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