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러드(2009)'
얼마 전 샵에서 블루레이 코너를 뒤적거리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던 작품이 전지현의 ‘블러드’였습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외롭게 전시되어있던 그 영화를 그냥 건너뛸 수가 없어 오랜만에 진득하게 다시 보고 싶었던 인셉션과 함께 집어 들어오고 말았는데요.
전지현은 이제 누가 뭐래도 국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여배우임에는 틀림없을 겁니다. 그런 전지현도 오래전 ‘엽기적인 그녀’의 성공 이후 밀려들었던 영화들을 소리 소문도 없이 차례차례 말아먹을 때가 있었는데 사실 영화가 잘 되던 게 얼마 되지 않았 , 그 당시 바닥을 쳤던 작품이 바로 이 할리우드 진출작이었던 ‘블러드’입니다.
이 영화는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라는 애니메이션에 오리지널 스토리를 덧붙인 작품인데, 전지현은 뱀파이어인 ‘사야’ 역을 맡아 개고생을 하며 영화를 촬영했었죠.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흥행에는 재미를 보지 못했었는데요. 이후 2012년 도둑들의 ‘예니콜’로 돌아오기까지 그녀를 이불 킥 속에 살게 했던 이 작품은 대체 어떤 작품이었을까요?
사실 전투 장면이 좀 어설퍼서 그렇지 그녀의 일반 연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영어 발음도 - 숨이 계속 이어지는 내레이션 때를 제외하면 - 괜찮았으며, 표정 연기도 캐릭터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잘 살렸다고 생각합니다. 영상 쪽도 전체적으로 어둡고 누렇긴 하지만 지저분하지 않았고, 장면이나 사건 간의 연결도 속도감 있어 관객이 집중하기 쉽다는 것도 장점 중의 하나겠죠.
하지만, 역시 스토리는 이게 뭔가 싶을 정도로 머릿속에서 지도가 만들어지지 않으며 지도가 너무 쉽게 만들어지며, 이런 류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 장면이 현장감 떨어지고 지루한 것은 큰 단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액션 장면에 와이어를 너무 많이 쓰고 슬로우에 의존해서 긴박감이 떨어지며, 검을 사용해 썰어대는 액션이 어설픈 CG로 인해 제대로 살지 않습니다. 특히 복사해서 붙여넣기한 듯 모든 장면에서 똑같이 폭죽 터지는 거지 같은 바둑알 피 그래픽 처리를 보고 있으면 '대체 이게 뭐지'하고 저절로 중얼거리게 됩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그 작업을 한 사람과 그 장면을 수락했던 디렉터 둘 다 종신형을 주고 싶을 정도인데, 비슷한 분위기의 같은 해 개봉된 비의 '닌자 어새신'의 그래픽 처리가 훨씬 더 박진감 넘치고 실감 나죠.
보통 일본의 유명한 애니메이션을 영화화한 경우 성공한 경우가 극히 드문데,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는 일본인의 특성상 원작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재현하려는 성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영화를 봐도 '와! 정말 만화를 그대로 보는 것 같아'하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게 분명히 저만은 아닐 겁니다. 만화 캐릭터를 똑 닮은 그녀의 비 오는 앞머리도 그 희생양 중 하나겠죠. 차라리 비가 올 때는 좀 자연스럽더군요. 그렇게 똑같이 하려면 가슴도 큰 배우를 섭외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도 와이어에 어깨, 허리 구속당한 채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방팔방으로 붕붕 날아다니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왠지 욕보다는 ‘파이팅’ 소리가 절로 나오는데다가, 의심할 여지없는 그녀의 외모 리즈시절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블루레이에는 메이킹 필름이 서플로 들어있는데 그 자료를 보면 나뭇가지 같은 팔다리로 너무너무 혹사당하고 있는 그녀가 안쓰러워 견딜 수 없을 정도입니다. 무슨 북한 특전사 교육도 아니고, '이게 세끼 먹는 인간에게 시킬 수행인 건가?'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하지만, 이때 몸으로 배웠던 여러 액션에 관한 기초가 이후 액션 연기에 큰 도움이 되었겠죠? 영화사에게는 흑역사로 기록될 영화겠지만, 전지현에게는 다양한 연기를 가능하게 해줄 기초체력을 다져주었던 작품으로 기억될 겁니다.
그 고된 수업과 촬영을 모두 마치고 메이킹 필름 인터뷰에서 '아 정말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악몽이에요'라고 웃으며 이야기하는 그녀가 더 무섭더군요. 애국심과 전지현에 대한 빠심 충만하신 분들이라면 한 번쯤은 보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전지현이 예쁜 것은 보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