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의 탄생(TVN)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글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예술작품을 감상해왔습니다. 각 콘텐츠들은 모두 관련 프로세스들의 최종 산출물이며, 퇴고와 제련을 거친 완제품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물론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대중들을 만족시켜 왔지만, 보다 영속력을 가지고 살아 숨쉬기 위한 조건으로도 부족함이 없을까요?
백화점 안에 진열되어 있는 제품들 사이에서 내가 마음에 드는 물건을 구매하듯, 웹사이트나 방송프로에서 노래 한 곡/책 한 권을 고르는 것이 요즘 콘텐츠를 만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입니다. 물론 최신/인기 제품 정도의 정보는 미리 주어지게 되지만, 해당 제품이 내 취향에 맞는지 확인하는 작업은 다분히 객관적이고 냉정한 작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나와 친한 누군가가 그 제품을 내게 권한다면 분명히 그 제품을 좋아하게 될 확률은 높아질 겁니다. 이제 그 제품은 나와 친한 그 친구를 이어주는 이야기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존에 요리를 하는 프로그램들이 신선했던 이유는 기존 요리의 개념을 확장시키며 더 많은 이야기 거리를 전달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일단 <요리>하면 접시에 담긴 완제품이 내 테이블 위에 놓일 때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했던 대중들에게, 재료 / 양념 / 조리도구 / 요리사를 분해하여 레시피 프로세스에 따라 조합해가는 과정 자체 - 이는 해당 요리가 만들어지는 이야기가 됩니다 - 를 전달하기 시작한 것이죠. 이로 인해 같은 요리라도 만드는 요리사의 레시피와 습성에 따라 수십 종류의 다양하고 개성 있는 콘텐츠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작업 프로세스가 같다고 하더라도 '재료를 원산지에서 구했느냐', '어떤 스타의 냉장고에서부터 가져왔느냐'에 따라서도 서로 완연히 다른 콘텐츠가 되는 것이죠.
이렇게 콘텐츠를 생성하는 과정 자체를 콘텐츠 화하는 것은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으며, 이를 음악에 접목시킨 것이 바로 TVN의 <노래의 탄생>입니다.
이 프로는 국내 최고라 할 수 있는 세션, 보컬들을 모아놓고, 지정된 프로듀스 그룹이 스스로 뮤지션 드래프트를 하여 45분 동안 미리 가사와 멜로디가 완성된 음악을 실제 발매할 수 있는 레벨로 완성해 내고, 원곡자에게 선택을 받는 쪽이 승리하는 포맷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청자들은 해당 프로그램을 보며 자연스럽게 음악을 만드는 과정 - 이 또한 음악이 담고 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죠 - 을 실시간으로 엿볼 수 있게 됩니다.
음악을 만드는 가장 일반적인 프로세스는 작곡자에 의해 멜로디가 먼저 만들어지고, 이 멜로디에 가이드(불완전한 가사나 허밍으로 보컬의 강약, 글자 수 등 원곡자의 의도를 반영한 목소리)가 입혀져 작사가에게 전달됩니다. 그 후 가사가 더해져 곡이 완성되면, 프로듀서에 의해 장르가 정해지고 편곡이 된 후 세션과 가수를 통해 최종 노래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죠.
이 프로그램은 프로듀서에게 전달된 이후부터 곡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커버하고 있는데, 사실 45분은 노래를 완성하기에 택도 없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속칭 '노래를 만들어 내는 바닥'에서 국내 최고라는 사람들을 모두 모아두었기 때문에, 경이롭게도 그것이 가능해집니다. 한마디로 그냥 놀랍죠.
프로듀서들이 대충 장르를 정하고 어떤 식으로 클라이맥스나 기믹을 만들어낼지를 구성하면, 편곡자들은 멜로디를 흥얼거리면서 수 분만에 편곡을 완료해버립니다. 편곡자에 의해 대충 코드가 얹어진 악보가 연주자들에게 전달되면 알아서 디테일들을 만들어 붙이는데 이게 정말 대단합니다. 기타들도 알아서 코드에 맞춰 착착 솔로 파트 멜로디를 만들어 얹고, 대충 느낌 정도만 전달하면 악기들끼리 쑥덕쑥덕 임팩트 있는 구성을 해냅니다.
보통은 유명한 프로듀서들 조차 경험하기 힘든 환경으로, 미디로 샘플을 얹거나 손가락으로 두드린 드럼을 입혀 작업할 때보다 훨씬 더 즐거운 작업을 경험할 수 있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겠죠.
<노래의 탄생> 3화에서 뮤지/조정치 팀과 윤도현/허준 팀의 배틀 때 작업실의 분위기를 보면 어떤 식으로 작업이 진행되는지 감을 잡을 수 있는데요.
베이스 : C#으로 베이스 계속 가나요?
조정치 : 네 아. 음.. F#으로 갈까요?
베이스 : 그렇게 하면 조금 평범한 느낌이고...
키보드 : 그러면, C#으로 가다가 마지막만 F#으로 1박만 가면 어때요?
(바로 연주해보고)
조정치 : 그렇게 가죠.
드럼 : 기타 솔로를 들어가기 전에 크레셴도를 죽였다가 갈 건지, 데크레센도로 갈 건지.(악기들을 점점 크게 진행시키다가 확 소리를 낮추어 기타 솔로를 들어오게 할 것인지, 아니면 악기들을 기타 솔로 파트 진입하기 전까지 점점 볼륨을 낮춰 갈 것인지)
뮤지 : (결정해줘야 하는데 우선은 갑자기 물어보니 조금 벙한 표정..)
드럼 : 아지타토로 물고 들어올 것 같으면(기타가 미리 이전 마디를 물고 빨리 들어올 거면) 우리가 브레익을 걸어주고..
기타 : 시키는 대로 그대로 다 할게요.
조정치 :.. 브레익을 걸어주시면 조금 더 극적이니까..
드럼 : 한 박자만 일찍 치고 들어오면 어때?
위처럼 정신이 없는 가운데 디테일 부분을 쿵쩍쿵떡 세션들이 알아서 만들어 가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 이 프로의 재미입니다.
이번 회 곡의 원곡자는 놀랍게도 경북 경주시 <푸르른 지역아동센터>의 소외계층 아이들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부모와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그대로 담아낸 곡으로, 보는 내내 이 아이들의 진심이 느껴져 가슴이 찡했는데요. 눈시울을 적시는 프로듀서들이나 세션들을 보면서 같이 울컥했던 사람들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사회의 진화에 기여하는 요소는 물론 여럿 있겠지만, 이를 풍요롭고 살만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역시 대중 문화이고, 그 중심에 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프로에 몸담고 있는 감성 충만한 여러 뮤지션들이 아닐까요?
3화에서는 최종 윤도현/허준팀이 우승을 하게 되었는데, 양쪽 모두 편곡이나 진행은 깔끔했습니다. 단지 뮤지/조정치팀 쪽에서 김세황(기타)을 선택했었는데, 최고의 기타리스트인 만큼 솔로 확보를 해주지 않을 수가 없었을 테고, 일단 준 이상 그 마디에서 튀지 않도록 하는 것도 쉽지 않았겠죠. 초반부는 깔끔한 도입과 함께 하림의 보컬이 잘 어우러지며 안정적으로 진행되었는데, 후반부 김세황의 기타와 뮤지의 코러스가 전체적으로 곡의 균형을 살짝 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네요.
상대적으로 절제된 윤도현의 기타 솔로가 음악 안에서 적절하게 곡을 잘 받쳐주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스타 세션들을 어떻게 활용할지 프로듀서들은 많은 고민이 될 것 같습니다.
우승이 확정되자 너무 좋아하는 윤도현을 보면서 뮤지가 이야기합니다.
뮤지 : 저한테 도현이 형이 얼마 전에 문자로 '우리 승패에 연연하지 말고 즐겁게 하자'하더니, 저렇게 쓰러지시네요.
윤도현 : 그건 원작자가 누군지 몰랐을 때고.. 아이들이.. 이걸 꼭 우리 노래가 음원으로 나왔으면 했거든요.
저는 이래서 윤도현이 좋습니다.
이제 시청자들은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이 노래와 관련된 <소외계층 아이들>의 모습. 그리고, 그들을 위해 꼭 자신이 부른 음원을 선물하고 싶어 했던 '윤도현'을 기억할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또 사연을 가지게 된 이 곡은 영혼을 가진 사람처럼 우리 사이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겠죠.
이 프로가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 앞으로도 시청자들에게 계속 멋진 경험을 전달해 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