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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니(샌프란시스코 버스)는 늘 같은 길을 가지 않는다

좌충우돌 샌프란 생존기

by Aprilamb

매일 산 같은 언덕을 두 개나 넘어 다녀야 하기 때문에 1번 뮤니(버스)는 내겐 부엌의 소금 같은 존재로,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사용하고 있다. 이 버스는 차이나타운을 가로지르기 때문에 승객의 대부분이 중국인 노인들인데, 덕분에 몇 달 타고 다니다 보면 중국인 젊은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맨 뒷좌석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 버스가 큰길 전 정류장에서 정차한 후 갑자기 모든 승객들이 웅성거린다. 헤드폰을 벗고 살펴보니 기사는 차에서 내리라고 손짓하고 있고, 중국 노인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차례대로 하차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덩달아 따라 내리긴 했는데 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다.


모든 사람이 하차하자 원래 직진해야 하는 버스는 큰길에서 우회전을 하더니 겨울에 해 떨어져 버리듯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 정류장에는 방금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과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던 사람들로 가득 한데, 화내는 사람도 하나 없이 그냥 차분히 다음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착하다기보다는 아무 생각 없는 낡은 인형 같다고 할까.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조금 기다리다 보니 다음 차가 도착했는데, 황당하게 또 모든 사람들이 하차하고 그 차는 앞차처럼 또 우회전해서 사라져버린다. 이게 뭐지. 도무지 어떤 상황인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데, 역시 수많은 사람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아이돌 집 앞에서 죽치고 기다리는 학생들처럼 다시 다음 차를 기다린다.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우버를 호출하고는 차를 타기 편한 사거리 건너편으로 이동했다. 기다리는 동안 계속 건너편 정류장을 주시했는데, 세대의 차가 - 그러니 모두 다섯 대의 차 - 동일하게 승객을 모두 하차시키고 오른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몇몇 바쁜 사람들은 나처럼 벗어나 택시를 집어 타긴 했지만, 수십 명의 사람들은 여전히 거리에서 국군의 날 퍼레이드를 기다리는 시민들처럼 침착하게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텅 빈채로 정차되어있는 뮤니


마침내 내가 호출한 택시가 와서 버스 루트를 따라 언덕을 올라가는데, 다음 정거장에서도 예측했던 대로 더욱더 영문을 모를 수십 명의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정말 아무런 정보도 없이 수십 분 동안 버스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뭔가 차가 오고 사람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는 재미조차 없이 말이다.

혹시 내가 모르는 정보전달 방법이라도 있어 모두 이 사건 발생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아니라면 사람들이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잖아.


궁금한 마음에 우선 인터넷을 뒤졌더니 금방 SFMTA(SF Municipal Transportation Agency)의 홈페이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우선 공지사항을 뒤졌는데, 거기에는 3일 전부터 서비스 확장이 완료되었다는 내용뿐이었다. 특히 1번 뮤니의 경우 배차 간격이 7분에서 6분으로 단축되어 시민들의 도시 내 이동을 더욱 편리하게 서포트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3일 동안 전혀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하긴 했지만 말이다.

사이트 바닥으로 스크롤했더니 서비스센터 번호가 보였다. 택시 안에서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해서 한 번 전화를 걸어보았다. 이미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체 무슨 일이었는지는 계속 궁금했기 때문이다. 번호는 우리나라 간첩신고나 화재신호 번호와 비슷하게 311만 누르면 된다.


불편사항이 있어서 전화했어.
응 말해봐.
나 지금 1번 뮤니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내리래서 다 내리게 되었어. 그리고, 그 후에 오는 버스들도 다 똑같이 더 이상 운행을 하지 않더라고. 무슨 일인지 알고 싶어.
네가 내린 버스 정류장이 어디야?


나는 이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세상에서 손꼽히는 길치로 손에 지도를 들고 있어도 내가 어디 있는지 전혀 찾아낼 수가 없는 사람이다. 7개월 동안 수많은 길들을 걸어 다녔지만 우리 집 앞 도로 이름 말고는 다 가물가물하기 때문에 중간에 내가 내렸던 곳이 어떤 길들의 교차로인지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스마트폰의 지도 어플을 구동시켜 큰길 이름을 찾았다.


어. 오래 걸려서 미안해. '반 네스'야.
'반 네스'랑 또 어느 길이야?
이 버스는 너네 노선인데 그 길 만으로 몰라?
'반 네스'랑 또 어느 길이야?
아 라파예드 공원 지나서 있잖아.
'반 네스'랑 또 어느 길이야?


순간 알파 고랑 이야기하고 있는 줄 알았네. 내 말에는 대답 안 하고 똑같은 말만 계속하고 있어. 아무래도 빨리 다시 찾아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다시 기다려 달라고 하고 지도에서 교차되는 다른 길의 이름을 찾아 불러주었다.


'클레이'야.
그래? 그럼 방향은 어디로 가고 있었어?
음. 바다… 쪽..?
다운타운 쪽이야?
응. 그런 것 같아.
지금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어. 불편 접수할 거야?
…응 할게.
이름, 이메일, 전화번호를 알려줘.
이름은…. 이메일은 'String'의 'S'에….. 전화번호는…
불편 접수번호는 '000000'이야.
그래, 내용 확인되면 알려줘. 궁금하니까.
받아 적어.
뭘?
'000-000-0000'
이게 뭐야?
어떤 내용이었는지 알고 싶으면 이리 전화해서 불편 접수번호를 말하면 돼.
불편을 접수했으면 너네가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야?
어떤 내용이었는지 알고 싶으면 이리 전화해서 불편 접수번호를 말하면 돼.


대충 전화를 끊고도 '내가 뭘 얻은 거지?' 하는 생각뿐인데, 아무래도 다시 전화를 해서 불편 접수에 대한 불편을 접수시켜야 하나 고민했다. 그래 봤자 또 나는 이름/이메일/전화번호를 불러주고, 불편 접수번호와 안내 전화번호를 받게 될 테지만 말이다.


정말 게으른 성격 때문에 평생 이렇게 서비스에 집착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그 원인이 너무 궁금해서 오후쯤 다시 전화를 걸었다. 힘들게 접수번호를 불러줬더니, ‘아직 접수 처리 중입니다. 죄송합니다’ 이런다.


질 수 없어 인터넷을 다시 뒤져보니 SFMTA의 트위터 계정이 있다. 타임라인을 살펴보니 비슷한 시간대에 캘리포니아 케이블 전력라인에 문제가 발생했던 적이 있고, 특정 지역에 화재가 났던 내용이 있었다. 암호처럼 써놓은 태그나 길 이름까지 찾아보긴 귀찮아서 그쯤에서 그만두었는데, 아무래도 차이나타운의 노인분들이 SFMTA의 트위터를 찾아보면서 ‘아 화재가 나서 지금 운행이 중지되었구나’하시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나도 그렇다.


San_Francisco_Muni_Flyer_Trolley_Bus_5208.jpg 급할 때는 저 와이어로 스마트폰을 충전 할 수도 있다(거짓말)


샌프란시스코의 버스는 대부분 'Muni Trolley Coaches'인데 공중에 전력케이블(Overhead Wires)을 따라 움직이는 전기차들이다. 이 차들은 루프에 'Trolley Pole'이라는 전력 공급 막대가 있고, 이 것을 전력케이블에 걸치고 다니면서 전력을 공급받는다. 이 차들은 'Auxiliary Power Unit(APU)'라는 별도의 동력장치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력공급을 받지 않고도 몇 블록 정도는 이동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역시 전력케이블에 문제가 생기면 제대로 된 운행이 불가능한 것이다.

가끔 두 전차의 전력 공급 막대가 엉켜서 두 운전사가 서로 막대를 휘적휘적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이 것이 생각보다 재미있긴 하다.(물론 내가 타고 있을 때는 재미있지 않다.)


어쨌든, 샌프란시스코에서 시간에 맞춰 장소 이동을 해야 한다면 꼭 우버나 리프트를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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