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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사계절을 맛보는 도시

좌충우돌 샌프란 생존기

by Aprilamb

이 곳에서도 대충 사계절을 보내 본 것 같다. 처음 오기 전에는 '캘리포니아' 하면 세상에서 날씨가 가장 좋은 지역으로 사계절 반바지와 반팔만 입고 다닐 수 있는 도시라고 생각했었다. 누가 뭐래도 오렌지가 익는 지역이니 말이다. 덕분에 반팔만 잔뜩 들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었는데, 난 아직도 처음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셔틀을 기다리던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 엄청 불어 대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아 추워'라는 말이 절로 나왔었다.

호텔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배고파서 먹을 것을 좀 사러 어둑어둑해진 샌프란시스코를 헤매는데 '이건 뭐지? 겨울인가?' 엄청 추웠다. 반팔을 입고 있으니 더 그랬겠지만, 어쨌든 이건 내가 생각했던 샌프란시스코의 날씨는 아니었다.


여기서 잠깐 알아보고 넘어갈 게 있다. 바로 오렌지의 재배 조건인데,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다른 재배지역과 달리,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재배되는 감귤류 대부분은 주스용으로 가공되지 않고, 청과물시장으로 출하됩니다. 온화한 날씨, 풍부한 일조량, 선선한 밤 날씨 등 다른 지역과는 비교되지 않는 이상적인 재배조건 덕분에 모양이 예쁠 뿐만 아니라 맛도 좋은 최고의 오렌지가 수확됩니다.


이 곳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읽었다면 '아 정말 따뜻하겠는걸?'하겠지만, 나는 저 '선선한 밤 날씨'를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겨울이던 여름이던 해가 떨어지면, 혹은 그늘에만 들어가도 이 곳은 싸늘한 것이다. 여름 한 낮에 길을 걸으면 햇살이 얼굴이 따가울 정도로 내리쬐지만, 건물 숲 사이에라도 진입하게 되면 갑자기 싸늘해서 몸을 움츠리게 되는 게 바로 이 곳의 날씨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여름이면 밤이라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덥고 겨울은 낮이나 밤이나 모두 견딜 수 없이 춥기 때문에,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여름에는 얇은 옷을 입으면 되고 겨울에는 두터운 옷을 입으면 된다. 하지만, 이 곳의 사계절은 이름뿐이고 계절별로 크게 특색이 없다. 겨울이라 해도 낮에 햇볕이 들면 여름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고, 여름이라 해도 밤에는 오리털 잠바를 입고 다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 아침에 나올 때 사계절을 대비할 수 있는 옷들을 준비한다. 얇은 옷을 입고 카디건을 들던지, 밤까지 오래 다닐 예정이라면 낮에 좀 덥더라도 외투를 입는다. 관광을 한다고 피셔맨즈 와프나 프레지디오 같은 바닷가 근처의 공원을 돌아다닐 생각이라면 낮이라도 무조건 두터운 옷을 입어야 한다. 바닷가 쪽의 바람은 햇살을 우습게 눌러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햇살은 또 무서워서 SPF 20 정도의 생활방수 같은 선블록은 로션만도 못하고, 선글라스가 없다면 동공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다. 한마디로 거지 같다.


사실 좋은 건 한 오후 서너 시쯤 햇살 좋은 공원의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않아있을 때 정도인데, 먼저 그 시간에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있을 일이 거의 없고, 만약 있다 해도 그때 바람 한번 휙 불면 추워서 바로 집에 가고 싶어 진다.


이 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토박이가 내게 했던 말이 있는데, 전적으로 동감이 가는 말이다.


나는 사람들이 왜 샌프란시스코가 따뜻한 곳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여기는 단지 아주 춥지 않을 뿐이라고.


샌프란시스코의 집들은 대부분 히터는 있지만 에어컨이 있는 곳은 거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쨍한 날 오후라도 일단 집에 들어오면 덥다고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호텔이나 더블린 쪽의 신축 아파트 같은 경우는 좀 다르지만, 샌프란시스코 시내의 집들은 대부분 수십 년을 버텨온 오래된 건물들이다. 덕분에 집들이 많이 허술한데, 특히 창문을 모두 닫아도 틈새로 바람이 술술 들어온다. 창문이 그따위니 히터를 켜도 제대로 그 효과를 보기 힘들다. 하지만, 우리나라 겨울 같이 온도가 내려가지는 않으니 이곳 사람들은 그냥 그냥 견딜만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뭐 아침이 오면 또 햇빛이 쨍할 텐데...


이런 느낌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낙천적이고, 또 이런 날씨를 평생 살아왔으니 몸도 그에 맞게 적응해왔을 것 같다. 모르긴 몰라도 이 곳 사람들은 밤이 되면 갑자기 피부 두께가 두꺼워지면서 모든 땀구멍들이 닫혀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여름에도 밤에는 긴팔을 입고, 안쪽에 기모가 있는 후드를 더 걸치고 잠을 잤다. 그러지 않으면 보통 새벽 세시쯤 너무 추워서 깨게 되기 때문이다. 겨울에 영하 15도 밑으로 떨어지는 것도 견뎌왔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반팔에 반바지만 입고 다닐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사는 게 그렇게 만만치는 않은 것이다. 가끔은 바닥이 따뜻한 우리나라의 집들이 그리워진다.

서울에서는 수년 동안 감기 한번 안 걸리던 내가 이 곳에서는 벌써 두 번째 감기로 고생하고 있는 것도 예측 불가능한 날씨 덕인데,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상상초월로 추운 밤 때문일 것이다. 결국 밤 사이 온몸을 두드려 맞은 것 같은 컨디션이 되어 화려한 아침을 맞이하게 되면 그 상실감 또한 두배가 되는데, 천국 같은 날씨에 나만 연옥을 걷는 벌을 받는 것만 같다.


서울에 있을 때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있었다. '나이가 좀 더 들면 따뜻한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여생을 온화하게 살고 싶어'라고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노년에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살게 되면 날마다 사계절을 겪으며 고생하다가 비참하게 얼어 죽게 될지도 모르니, 꼭 조금 떨어진 더블린 쪽에 아파트를 얻길 바란다. 그곳은 창이 새시이기 때문이다. 한국인 가족 집에 초청받아서 갔다가 밤에 바람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이 곳에서는 저런 말도 안 되는 것에 감동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꼭 샌프란시스코에서 살 꺼라니까!'라고 하시는 분들은 돈을 많이 벌어서 퍼시픽 하이츠나 시 클리프 쪽에 신축된 집을 구매할 것을 권하고 싶다. 물론 엄청나게 많이 벌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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