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샌프란 생존기
샌프란시스코에서 감기에 걸리는 건 왠지 오뉴 월에 개가 감기에 걸리는 것처럼 낯선 느낌일지도 모른다. 그도 그런 것이 한국에서는 여름에 감기가 걸려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감기가 잘 걸리지 않기도 하지만, 걸려도 대체로 약을 먹지 않고 이겨내는 편이다. 감기는 체스의 '폰' 정도 느낌으로, 이것을 도움을 받아 이겨내야 한다면 다른 병들이 인간을 지배할지도 모른다. 인류를 위해서는 아니지만 어쨌든 비슷한 이유로 감기약은 먹어본 적이 거의 없다.
한국은 의사의 처방을 받아야 약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약의 상표, 효능, 기능 등에 대해 알 필요가 없다. 그냥 주는 대로 먹으면 된다. 복용한 약의 조합을 기억해낸다 해도 '노란색 타블렛 한 개와 빨간색 캡슐 두 개. 그리고, 가루약은 먹지 않음' 정도로 재활용의 가치가 전혀 없는 정보 뿐이다.
하지만, 이 곳은 가벼운 약들은 모두 의사의 처방 없이 스스로 판단한 후 편의점이나 Grocery에서 직접 구매해야 한다. 덕분에 '아 머리 아파. 약이나 사 먹어야겠어.' 따위의 안일한 생각으로 편의점에 갔다가는 소독약 하나 집어 오기 힘들다. 요컨데 공부가 필요하다. '아파 죽겠는데 웬 공부?'라는 생각이 절로 들겠지만, 이 곳에서는 어쩔 수 없다.(물론 평가는 받지 않는다.)
미국에서 약은 어디를 가도 쉽게 구할 수가 있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무슨 말인가 하니 약이 종류가 엄청나서 대체 뭘 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이다.
저것들이 다 팔리긴 하는 건지 궁금해 죽겠을 정도로 미국에서는 음식이던 학용품이던 종류가 한둘로 끝나는 것이 없다. 마트의 치즈 코너 앞에만 서있어도 종류가 너무 많아 내가 뭘 사려 했는지 가물가물 기억이 안 난다. 요거트만 해도 수십 종류가 있는데 정말 같은 회사에서 같은 내용물로 뚜껑만 수십 개 다르게 제조해서 판매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 이유로 이 곳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 만의 Drug 레시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이 아파서 인류의 생존이고 뭐고 약을 먹고 나부터 살아야겠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들은 단지 병-약 정도의 단순한 매칭이 아니라, 그 약의 성분, 효능, 부작용까지 모두 꿰고 있는 경우가 많다. 왠지 간호조무사와 이야기하는 느낌이랄까. 듣다 보면 병원에 와있는 것 같다. 성분과 부작용까지 줄줄 외워 댈 때에는 아픈 것을 잊고 조금 감동했었다.
이번 감기로 추천받았던 약들을 이야기해 보자면, 상대적으로 가벼워서 먹고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Theraflu, Robitussin이라는 약이 있고, 약간 무겁지만 효과가 좋다는 NyQuil이 있다. NyQuil을 소개해준 사람은 이렇게 덧붙였다.
이걸 먹고 자면 다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나게 될 거야. 견딜 수 있다면 효과는 최고인데, 밤에 악몽에 시달릴 수도 있고, 응급실에 실려간 사람도 있으며, 가끔 죽기도 한대.
저 이야기를 들으니 NyQuil은 절대 먹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자신은 자주 애용한다고 하니 또 희한하다. 한국에서라면 아마 아무도 먹지 않을 것 같다. 이 곳은 목숨을 걸고 감기를 치료하고 싶은 사람들이 꽤 많은 건지, 저 약도 꽤 인기가 있다고 한다.
나는 끝까지 약을 먹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쩌다가 Robitussin을 구하게 되어 홀짝홀짝 마시고 있다. 우리나라 어린이용 감기 시럽 같아서 달달한 게 맛있기 때문에 아프지 않을 때도 가끔 먹을만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서너 번 먹었는데 내 감기에는 크게 효과가 없는 느낌으로, 먹고 날 때마다 새로운 증세로 전환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게 낫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몸살과 두통으로 고생하다가 지금은 기침을 심하게 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NyQuil만은 먹지 않으려 한다. 소개를 해 준 사람이 주변에 발견하고 911에 전화해 줄 사람이 없다면 추천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