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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를 잊으면 큰일 납니다

좌충우돌 샌프란 생존기

by Aprilamb

샌프란시스코의 시내의 집들은 대부분 지어진지 수십 년 이상 되어 매우 낡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자동 도어록이 달린 현관은 찾아보기 힘들다. 처음 집을 구하고 계약서에 서명을 하자마자 주인 할아버지께서 내 손에 노란 봉투 하나를 꼭 쥐어주셨는데,


이. 이게 뭐죠?


집 열쇠였다. 아파트 열쇠 한 개, 현관 열쇠 두 개 그리고, 우편함 열쇠 하나 이렇게 모두 네 개의 열쇠가 촌티 나는 열쇠고리에 엮여 있었다. 서울에서도 물론 아파트 열쇠가 있기는 했었지만, 비밀번호를 입력한 도어록을 사용했기 때문에 열쇠를 들고 다녀 본 기억이 없다.

나는 한 해에 우산을 기본적으로 두 개는 잃어버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열쇠를 받자마자 겁이 덜컥 났는데, 물론 열쇠는 우산처럼 쓰고 다니는 물건은 아니지만, 왠지 불안했기 때문이다. 우산도 쓰고 있을 때는 잃어버리지 않는다.


다음 날 바로 열쇠를 여러 벌 복제하기 위해 집 주변의 Locksmith를 찾았다. 아무래도 몇 벌 더 만들어서 집 앞에 파묻어 두고, 가방마다 넣어두고 해야 안심할 것 같아서였다. 들어가서 열쇠 꾸러미를 주면서 세 벌을 복제해 달라고 했더니 열쇠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뭔가 하고 나도 같이 들여다봤더니 'Do Not Duplicate(복제 불가)'라고 각인이 되어있었다.


이거, 복제 안 되겠는데?
내가 사는 집인데도?
응. 주소가 어떻게 돼?
0000 XXXXXXXXXXX야.
잠시만 기다려봐.(어딘가에 전화를 한다) 네. 누가 그 집 열쇠를 복제해달라고 왔는데 해도 돼요? 잠시만요. 전화받아봐.
아 네. 전데요. 혹시 몰라서 복제해두려고요.


Locksmith가 건네 준 전화의 상대는 집주인이었다. Locksmith들은 모든 집주인의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는 건지 아니면, 집주인이 여기서 복제를 했었던 기록이 있었던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좀 놀랐다. 뭔가 불완전해 보이는 아날로그적 프레임웍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뭐 그래 봤자 나를 아는 누군가가 내가 식사를 하는 동안 열쇠를 훔쳐내어 빨리 열쇠를 복제하고는, 다시 내 가방에 집어넣어 두려고 하지 않는 한은 그리 유용할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열쇠를 복제해서, 하나는 가방에 가지고 다니고, 하나는 현관 앞 선반에 올려두어 가방을 가지고 다니지 않을 때 들고나갔다. 나머지 하나는 집 앞 공원에 파묻어두고 싶었지만, 왠지 비가 올 때 떠내려 가거나, 길가던 강아지가 파먹거나 할 것 같아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버릇이 되도록 잘 챙겨 다녔기 때문에 그 이후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 적은 없었는데, 드디어 오늘 그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삑~삑~~

집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초인종 벨소리가 울렸다. 가끔 UPS기사들이 택배 수신자가 응답하지 않는 경우, 택배를 놓고 가려는 의지로 집 안의 모든 벨을 울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건 아주 기특한 일이기 때문에 보통 집에 있으면 내려가서 문을 열어주는 편이다. 그런데, 저 벨소리는 진짜 한번 듣고 나면 절대 두 번째 울리게 하고 싶지 않은 배려심 없는 소음으로, 소리에 민감한 사람이나 임산부라면 언제 울릴지 모를 벨소리에 대비해 귀마개를 추천하고 싶을 정도이다. 오늘도 두 번째 벨이 울리기 전에 미친 듯이 튀어 나가서 문을 열어주고는 들어오려는데, 살짝 열어두었던 현관문이 닫혀버리고 말았다. 이런 경우는 처음으로, 열쇠는 모두 집 안에 있으니 당연히 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다행히 휴대폰을 가지고 있어서 집주인에게 전화를 할 수 있었는데 할머니께서 전화를 받으신다. 지금 집을 이미 나섰는데 다시 들어가서 열쇠를 현관 앞 매트리스 밑에 놓아두고 나가시겠단다. 운동복 바지에 대체 휴대폰은 왜 가지고 있었는지 이해가 안 가지만 칭찬해 주고 싶었다. 정말 큰일 날 뻔했어. 만약 전화가 없었다면 정말 운동복 차림으로 쭉 홈리스처럼 살아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바로 전화로 알려주었던 주인집에 가서 매트리스 아래 열쇠를 집어와 무사히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정신없던 상황이 정리되고 좀 정신을 차리니 할머니에 대한 감사가 다시 물밀듯이 밀려왔다. 거동도 쉽지 않으실 텐데, 어쨌든 집을 나섰다가 다시 돌아가시는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해 주신 것이다. 이렇게 고마운 상황에 다시 열쇠만 달랑 Postbox에 밀어 넣고 오는 것은 왠지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나보다 돈 많은 집주인에게 팁이나 사례금을 동봉해 드리는 것도 이상할 것 같다.


열쇠 대여 감사 카드


그때 갑자기 이 곳은 편의점이나 마트, 서점 어딜 가도 카드 코너가 따로 있는 미국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이 곳 사람들은 아직 아날로그적인 소통을 중요하게 여겨 생일이나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카드를 주고받는다고 한다. 정말 도시 여기저기에서 저게 정말 다 팔리나 싶을 만큼 다양한 카드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물론 나는 한 번도 사본 적은 없다.

기회가 왔으니 샌프란시스코 거주민 답게 평생 처음 감사 카드나 써볼까. 어버이 날에도 안 쓰기 때문에 부모님께는 비밀로 해야 할 것 같다. 사러 나가기도 귀찮고 해서(사실 집 밖에 나가는 것이 무서워짐) 집에 있던 도화지에 우리 집을 슥슥 그려서 카드를 만들고, 남는 A4 용지로 봉투도 만들었다. 그리고는 열쇠 봉투에 함께 넣어 다시 주인집 PostBox에 밀어 넣어두었다. 이걸 보시고는,


허허허. 우리 집이구만.


하시면 좋겠지만,


대체 잘해줄 필요가 없군. 현금은 어쩌고 쓸데없는 종이 쪼가리를 보낸 거야?


한다 해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은데, 나 같아도 현금이 조금 더 좋을 것 같다.


다음부터는 정말 열쇠를 몸통에 달고 다니던지, 쇠통에 넣어 집 근처 공원에 묻어두던지, 뭔가 다른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 같다. 21세기에 왜 열쇠를 사용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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