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남자 친구의 여자와 동거라니

나는야 콘텐츠 소비자

by Aprilamb

에쿠니 가오리의 글은 간결합니다. 해야 할 말들을 써내려 간 후 단어별로 도막 내어 휘휘 젓고, 다시 한 움큼 집어 올려 그만큼 만으로만 조합해 낸 문장 같죠. 마치 수줍음 많이 타는 여자 후배가 들릴 듯 안 들릴 듯 오물오물해대는 이야기처럼.


한 명 한 명 살펴봐도 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듯이, 소설이든 실제든 어디에도, 같은 사랑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는 만큼, 혹은 문장으로 읽어 낸 만큼 만으로는 다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겁니다.

에쿠니 가오리는 조곤조곤 혼잣말을 하듯 리카의 목소리로 이야기합니다. 세상에는 이런 이별도 있다고 말이죠.


소설은 겐고(다케오)와 리카가 헤어지는 장면부터 시작됩니다. 남자 친구인 겐고는 하나코라는 여인을 알게 된 후 리카에게 이별을 고하고, 그녀는 그 이후에도 계속 과거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하나코와 동거를 하게 되는데요.

자신의 상황에 끌려만 다니는 리카와는 다르게, 주변의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하나코. 그녀는 하나코를 질투하지만, 동시에 부러워하며, 그리워하게 됩니다. 소심하고 미련이 많은 리카에게 하나코는 리비도이고, 이상향입니다.


남자 친구의 새 여자 친구와의 동거라니요. 식물같이 무덤덤한 하나코와 에쿠니 가오리 특유의 잔잔한 진행 덕분에 읽는 중에는 인지하기 힘들지만, 정신 차리고 보면 황당한 설정에 ‘이게 뭐지?’ 하게 됩니다. 하지만, 소심하게 투덜거리는 것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만 아니라면 앉은자리에서 하이틴 로맨스 읽듯 술술 다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네요. 잠깐 쉬어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낙하하는 저녁’입니다.




*김난주(역)씨는 주인공 이름 한자의 요미가나를 잘못 알아서 ‘다케오’라고 번역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후 역자 후기에서 ‘겐코’가 올바른 발음임을 알게 되었지만, 번역할 때 잘못 읽었던 ‘다케오’를 그냥 사용했다고 하네요. 일본 소설 번역의 지존이시긴 하지만, ‘이건 좀 아닌 거 아닌가?’하게 됩니다. ‘다케오’라는 이름이 더 어울린다는 말도 좀. 저는 읽는 내내 ‘여인추억’의 작가 도미시마 다케오가 생각나던데.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긴박감 제로인 메멘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