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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싶지 않은 너의 기억

신카이 마코토: 너의 이름은

by Aprilamb

사실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보는 사람마다 좋다고 하길래 별 고민 없이 바로 봤네요. 상영관에는 생각보다 어린아이들도 많았고, 자리도 거의 비어 있는 곳이 없었습니다. 제가 본 회차만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초속 5센티미터', '언어의 정원' 등 비교적 유명한 작품들이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한 번도 그의 작품을 접한 적이 없었습니다. 덕분에 마치 신인 감독의 작품을 감상하듯 볼 수 있었어요.
이 작품은 성별이 뒤바뀐 남녀의 이야기인데,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좀 흔하죠. '스위치', '키스의 전주곡'도 그런 소재였고, 국내 영화로는 '체인지', 드라마로는 '시크릿가든'도 있었네요. 그래서 그런지 감독은 새로운 설정을 하나 더 했는데 바로 평행 우주론이죠. 다른 시간대의 세상에 존재하는 두 주인공을 두고 꿈의 프레임웍을 차용한 후 성별을 바꿔버린 겁니다. 이 정도면 조금 덜 식상한가요?


이 아래로는 스포일러가 있으니 영화를 보실 분들께서는 피해 주세요


특이한 설정에서부터 마을로 혜성이 떨어지는 위협까지, 다이내믹하고 긴박감 넘치는 구성을 자랑하고 있는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루한 부분이 하나도 없습니다. 영상미도 뛰어나 이토모리 마을이나 시끌시끌한 동경 모두 정감 있고 따뜻하게 느껴지는데요. 스크린 안의 멋진 마을이나 숲의 원경, 동경의 카페나 거리를 보며 '아, 저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다'라고 생각한 사람이 저만은 아닐 것 같네요. 심지어는 마을을 박살 내는 혜성의 낙하 장면까지도 눈물 나게 아름답습니다.
마을 사람들 오백 명을 구해야 하는 임무 속에서 엇갈리는 인물과 희미해지는 커뮤니케이션에 손에 땀을 쥐기도 했지만, 저는 영화를 보고 나서는 이 이야기가 하고 싶어 졌습니다.


'기억'이라는 것


사람들은 현재를 살아가면서 분노하기도 하고, 행복을 느끼거나, 사랑하기도 합니다. 여러 감정들은 그 순간에 가장 높은 강도로 느끼게 되고, 또 바로 기억 속에 저장되어 버리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감정들은 둔해지고, 잊히고, 희미해지고, 왜곡돼 버립니다. 가슴 아파 미칠 것 같던 사랑도 삼류 영화의 그것처럼 가벼워지고, 더는 행복할 수 없을 것 같던 느낌도 천천히 희석되어 버리는 거예요. 하루하루 밑으로 가라앉는 기억 덕분에 현재의 감정들은 늘 인생 최고처럼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이 두 주인공은 서로를 보고 만질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내 서로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부분은 설정에 따른 특이한 현상이라 한다 해도, 삼 년 전에 미츠하가 동경으로 올라와 그녀의 머리끈을 주었던 일 조차 타키는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합니다. 그것은 꼬인 공간에서의 기억 같은 것이 아님에도 말이죠.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이나 기억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만, 사실 그것은 왜곡되기 쉽고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손바닥에 씌어 있던 것이 그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보았을 때, 더는 그것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저도 그녀처럼 절망적인 기분이 되어버렸습니다. 저 기억도 점점 더 희미해져 결국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그녀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잊고 싶지 않아도 잊게 되고 좋았던 것들도 아득해지겠지만, 가슴 아팠던 것들이나 고통스러웠던 것들도 동시에 희미해질 테니 그런 건 아주 억울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역시 좋았거나 사랑했던 기억들은 잊고 싶지 않고, 잊힌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플 것 같네요.




미츠하가 죽던 날의 아침으로 기적처럼 돌아갈 수 있었던 타키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가슴을 만지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네요. 이 영화만큼은 조금 용기를 내서 강력하게 추천해볼까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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