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의 '표백'
오랜만에 단숨에 읽어버린 소설이네요. 뭐 하나를 진득하게 하지 못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아무리 흡인력 있는 책들도 열 번 이상 집어 드는 편인데요.(제노사이드는 삼 년을 읽었죠) 이 책은 조금 달랐습니다.
작가가 전직 기자여서 그런지 문체가 간결하면서도 명확합니다. 직업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소재 자체도 사회고발적이며 문제의식을 가득 담고 있습니다. 특이한 소재로 속도감 있게 달리고 있기 때문에 올라타기만 한다면 그대로 마지막 장까지 논스톱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 소설은 '실제 생활'과 그 생활 속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사건의 기록'이 교차 편집되어 이어지는 구성으로, 처음에는 '사건의 기록'이 허구인지 아니면 실제 상황인지 제대로 알아챌 수 없어 갸우뚱하게 되지만, 중반 이후 실제 주인공들과의 관계가 드러나면서부터는 두 이야기가 급속도로 시너지를 내며 몰입도를 높여줍니다.
줄거리는 사회에 반감을 가진 엘리트 소녀가 주변의 사람들을 자살하게 만들고, 스스로도 자살을 한다는 계획을 실천하는 내용인데요. 놀라운 것은 그녀의 자살이 선행된다는 것이죠.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심어놓은 프레임 하에서 성실하게 죽음을 준비하고 이행합니다. 왠지 사이비 종교 교주 같은 느낌 아닌가요? 상당히 자극적인 내용이지만 작가는 자신 만의 논리로 이 상황을 설득력 있게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표백 세대는 개인의 개성이나 특수성이 전혀 반영될 수 없는 굳건하게 완성된 사회적 프레임웍 하에 살아가게 되는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완벽한 매뉴얼 하에 작동되는 사회는 실패나 부적응은 모두 개인의 잘못으로 정의해버리고, 개인의 능력이나 열정이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작가가 생각하는 현 세계는 그런 모습이에요.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아래와 같습니다.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그런 세상에서 큰 틀의 획기적인 진보는 더 이상 없어. 그러니 우리도 세상의 획기적인 발전에 보탤 수 있는 게 없지. 누군가 밑그림을 그린 설계도를 따라 개선될 일은 많겠지만 그런 건 행동 대장들이 할 일이지. 참 완벽하고 시시한 세상이지 않니?
주인공 세연은 이런 세상에 자신의 죽음으로 경종을 울리기 위한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그전에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패배자의 모습이 아닌 당당한 엘리트의 위치에 올라서는 것입니다. 자살계획에 포함된 주변의 인물들도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로 선정하게 되죠. 전혀 자살할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세연의 계획에 따라 하나하나 자살하는 모습은 정말 섬찟합니다.
소설에 인용된 책들을 보면 작가의 독서량도 상당한 것 같네요. 몇몇 맘에 드는 것들은 시간 날 때 읽어보려고 적어두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여러 작가의 작품을 돌아다니지 않고 마음에 드는 작가를 파는 성격인데, 오랜만에 국내 작가 중에 그런 작가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표백'을 읽고 나서 바로 '우리의 소원은 전쟁'을 읽고 있어요) 게다가 모국어로 써진 책을 읽고 있으니 장갑을 끼지 않고 맨손으로 눈을 뭉치는 느낌이랄까요. 번역서를 읽을 때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어 국내 서적을 더 많이 읽고 싶어 졌습니다.
긴 연휴는 아니지만 한번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네요. 내용은 조금 자극적이지만 재미는 보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