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제노사이드라는 소설을 추천받아 구매하고 읽기 시작해서 끝내는데 3년 정도가 걸린 것 같습니다. 이 정도면 정말 제겐 기적 같은 사건인데, 보통 책의 첫 장을 넘긴 후에는 다 읽어버리거나 조금 보고는 다시는 집어 들지 않았으니까요. 어쨌든 끝내고 싶을 의지가 생길 만큼 재미있었다는 이야기겠죠?
다른 소설들도 그렇긴 하지만, 특히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집필 전에 사전 조사나 논리적 교차검증 작업을 치밀하게 한 것이 눈에 선명하게 보입니다. 마이클 클라이튼이나 로빈 쿡처럼 전공으로 익숙해진 지식들을 기반으로 소설을 쓰는 것도 아닌데, 전문지식의 시전이나 그 관계에 대한 논리적 서술이 꽤 자연스럽거든요. 조금 읽다가 작가의 전공이 궁금해져서 인터넷을 뒤져보았을 정도네요.
스피디하게 교차 편집되며 전개되는 스토리도 흥미진진하고, 작가가 작품 내에서 전달하고 싶어 하는 메시지도 명확합니다. 캐릭터들도 개성 넘치고, 발생하는 사건들도 서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무엇보다도 재미가 있습니다. 재미있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오래 읽었던 것은 책이 상당히 두껍기 때문인데, 조금 읽다가 계속 남아있는 페이지들을 보면 질려 그냥 덮고 싶어 집니다. 그렇게 놓아두면 또 한 두 달 훌쩍 가버리고, 마음 다잡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또 질려서 내려놓고. 덕분에 초반 대통령 브리핑 장면은 눈을 감으면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질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정말 재미있다고요. 두껍다는 허들만 잘 참아낸다면, 앉은자리에서 다 읽어버리는 것도 꿈은 아닙니다.
대체 인간은 뭘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 나 자신에게 물어보게 됩니다. 지구 상의 여러 다른 동물과는 다르게 높은 지능을 보유하고 있고, 이를 활용하여 창조적으로 문화를 생성/유지하며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생명체, 인간.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서로를 기만하고, 밟고, 죽이는 이기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수백의 장점이 있다 해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변을 자멸로 몰고 가는 이 인류가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작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같은 목소리로 이야기합니다. 나보다 우리를 생각하라고, 보다 나은 가치를 추구하라고, 서로 돕는 미덕을 발휘하라고, 정의를 위해 일어서라고 말이죠. 물론 모두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어떤 가치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사람마다 모두 다른 입장과 상황 속에서 외줄 타듯 그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건 아닐까요? 원하는 대로, 혹은 원하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여기까지 와버리고 말았어하게 되었던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래서, 무작정 원망하거나 욕을 할 수도 없는 거예요. 비정상 같아 보이는 인류지만 고개를 숙여 들여다보면 한없이 가엽고 안쓰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쯤이면 역시 절대적인 선에 대한 판단이나 인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정의가 모두 흔들리는 것을 느끼게 되죠.
위대해지거나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짐을 벗어버리고, 나비가 바람에 날려 꽃잎 위에 떨어지듯,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어떨까요? 인생이라는 건 그리 길지 않습니다. 숨이 멎는 순간 돌아보면 꽃잎이 바람에 날려 흙 위에 내려앉는 시간만큼도 안될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SF적 장치와 논리적 구성에 놀라면서도 정작 읽다 보면 다른 이유로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해졌던 소설. '제노사이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