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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레 요코: 구깃구깃 육체백과

사월양의 서재

by Aprilamb


명동 쪽에 갈 일이 생겨서 근처에서 일하는 친구와 저녁 약속을 잡았는데, 생각보다 일이 일찍 끝나게 되었습니다. 약속 시각까지 뭘 할까 고민하다가 주변을 둘러보니 인터파크의 오프라인 매장 '북파크'가 보이네요.


생긴지는 오래되었지만 이 곳에 올 일이 거의 없으니 몇 번 와보지는 못해서 늘 볼 때마다 '맞다. 여기 서점이 있었지?' 하게 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는 특이하게도 책을 구매하는 것 외에 대여도 가능한데, 집이 가까웠다면 분명히 한권 정도는 집어 들었을지도 모른겠어요. 아니 반드시 그랬을 겁니다.


대여라는 건 조금 애틋한 느낌인데, 일정 기간 소유하게 되지만 분명히 반납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기 때문이에요. 빌려서 책상 위에 올려두면 '있을 때 잘해. 난 이제 널 떠나야 한다고.'라고 말하는 것 같을 테니까. 왔다 갔다 하면서도 계속 책이 놓여있는 책상 위를 쳐다보게 될 것 같고, 시간이 날 때마다 펴들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은 어느 정도 낡아 부담이 없기 때문에 옆집 아주머니나 제과점 주인 할아버지 같은 느낌으로 인사하고 쓱 지나치면 다시 생각나지 않지만, 이곳에서 빌려주는 책들은 대부분 새 책이라 마치 며칠 후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버릴 여자친구를 대하는 느낌일 것 같네요. '가면 편지해'라고 해봤자 그래 줄 리가 없으니 반납하기 전에 모두 읽고 마음에 새겨두어야 합니다. 조금 재미없다 해도 왠지 열심히 읽게 될 것 같지 않나요?




복잡한 책들은 피하고 싶어서 에세이 책장 근처를 왔다 갔다 하다가 무레 요코('카모메 식당'의 작가)의 '구깃구깃 육체 백과'라는 책을 집어 들게 되었습니다. 표지가 조금 유치하긴 하지만 나름 귀여운데, 내용은 어떨까 하고 펼쳐 조금 읽다 보니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리고 말았어요.(코너 바로 앞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이 에세이는 신체의 여러 부위를 소재로 서너 페이지 남짓의 터들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나라면 '도대체 무릎에 관해서는 무슨 글을 써야 하는 거야?' 할 것 같은데, 작가는 나름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조곤조곤 소탈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갑니다.


그녀의 작품인 '카모메 식당'은 영화로만 접해보았는데, 조금 심심하긴 하지만 중간에 멈추지 않고 끝까지 보았던 기억이에요.(저는 보다가 지루하면 바로 잠들어 버립니다) 주연인 고바야시 사토미가 나름 우아하고 매력 있기도 했지만, 여러 평범한 에피소드들이 지겹지 않게 이어져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물론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는 '이게 끝이야?' 하긴 했지만.


이 에세이도 딱 그 영화를 보는 느낌으로 너무 재미있어서 미칠 지경은 아니지만, 계속 다음 장으로 끊지 않고 이어 읽게 되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그녀는 나이도 지긋하고 전형적인 일본인 체형이어서, 대부분 자신의 열등한 상태에 대한 푸념이 많은 편인데요. 그래도 꿋꿋하게 만족스러운 점을 찾아 긍정적으로 써내려가고 있기 때문에,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집니다. 실실 거리게 된달까요?


서점에서 다 읽어버리는 바람에 무레 요코에게 미안한 마음이 한가득인데, 그녀의 다른 책은 꼭 사서 읽겠다고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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