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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듯 그대로인 '기사단장 죽이기'

기사단장 죽이기 - 무라카미 하루키

by Aprilamb

오랜만에 하루키의 신작이 출간되었습니다. 단편소설을 포함하면 ‘여자 없는 남자들’ 이후로 3년 만이고, 장편만으로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이후 4년 만이네요. 그의 작품은 소설, 에세이 크게 가리지 않고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번역되어 출간되자마자 구매를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그만의 장점이 몇 가지 있는데, 계속 다음 문장으로 타고 가게 만드는 세련된 문체. 그리고, 짜임새 있고 허점이 별로 없는 구성이 그것입니다.


아무리 내용이 궁금하다 해도 별로 읽히지 않는 문장을 연속으로 만나게 되면 책을 내려놓게 되는데, 저는 그런 부분에는 특별하게 냉정하기 때문에 끝까지 읽지 못한 책들이 꽤 많은 편이거든요.

하루키의 글을 읽다 보면 정말 군더더기가 없구나 싶은데, 이건 정말 냉정할 정도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런 문장들을 계속 읽어야 하나?’ 하며 책을 놓게 되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대부분의 문장이 수십 번 담금질하고 망치로 내려쳐 단련시킨 쇠 같습니다.


보통 단편소설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구성보다는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조금 더 집중하게 되는데, 아무래도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제한된 페이지 안에서 표현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일 거예요. 쓰는데 익숙한 작가들은 전달하려는 내용을 표현하다 보면 문장에 점점 군더더기가 붙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사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인데, 축약하고 줄이는 것이 많이 만들어 붙이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고통스럽기 대문일 겁니다. 덕분에 단편의 경우 구성은 좀 손해 보더라도 ‘어쩔 수 없지’하면서 써 내려가는 사람들이 꽤 많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하루키의 단편은 - 물론 별로인 것도 있지만 - 읽고 나면 마치 장편을 읽은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예를 들어 보자면 삽화를 더해 단편으로도 출간했던 ‘잠’도 그랬고, ‘여자 없는 남자들’의 ‘드라이브 마이카’도 읽고 나서 꽤 감탄했었습니다. 마치 본네트가 열려 엔진이 보이는 자동차 미니어처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칭찬은 대충 이쯤 해두고요.


‘기사단장 죽이기’는 하루키의 그런 장점들이 그대로 녹아 있고, 일부 더 진화되어 있습니다. 물론 사람은 점점 발전하는 것이겠지만, 작업이 끝나면 일부 뇌를 리셋하고 백지상태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천재들도 있으니까요. 하루키는 분명히 그런 부류는 아닙니다. 오히려 후천적인 모범생처럼 자신의 장점들을 하나하나 그러모아 다음 작품에서 놓치지 않고 다시 녹여내는 사람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덕분에 이 작품도 훅훅 잘 읽히고, 구성도 만족스럽고, 재미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아쉬운 것은 하루키 작품의 냄새가 행간에 그대로 숨어 있어서 아주 새로운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인데요. 물론 소재나 구성은 이전 작품들과는 다르지만, 이야기하는 톤이나 주인공이 삶을 대하는 자세 같은 것들이 늘 같기 때문에 전작들 위에 지은 집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고 생각해요. 하루키 작품 속의 주인공은 모두 하루키 자신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으며, 주인공의 나이가 어리던 중년이던 그 분위기나 소설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늘 비슷하거든요.


그의 글을 좋아하는 친구와 이 소설에 대해 의견을 나누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조금은 식상한 부분도 있고, 점점 노인네 티를 내는 것 같아서 그냥 그랬어. 특히 그 어린 여자에 대한 판타지는 짜증 날 정도라고. 실제 세상에 처음 만나는 아저씨에게 자신의 가슴 크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초등학교 여학생이 어디 있냐고?’


그건 그렇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씨.


그래도, 저는 책을 덮자마자 그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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