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오늘 날씨는 맑음
연휴가 꽤 길었다. 덕분에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친척과 중간쯤에서 만날 수 있었는데, 서울과 미국의 중간이라면 하와이뿐이다. 하와이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는데 - 미국에서 호주로 갈 때 비행기에 환자가 생겨 잠깐 들렀던 경험이 있긴 하지만, 밤이었어서 창 밖으로 공항도 보지 못했었다 - , 사실 크게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국의 제주도처럼 왠지 흔한 느낌이 들기도 했고, 섬이라 그런지 동남아의 휴양지와 별다를 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실제 도착해보니 그곳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미국이었다.
(본 섬이 아니라 마우이'Maui'였는데도) 호텔이나 리조트를 조금만 벗어나면 메릴랜드에 온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돌아다닐 정도로 거리나 건물들이 미국스럽고, 사람들 역시 - 웃통을 깐 채(죄송) 레이(Lei: 하와이의 전통 꽃 목걸이)를 목에 걸고 웃고 있는 것이 아니라 - 말쑥하게 차려입고 묵묵하게 일하고 있다. 심지어는 월마트, 세이프웨이, 게임스탑까지 다 있으니 이건 누가 봐도 그냥 미국의 한 도시다.
하지만 그런 것들 보다도 ‘아 여긴 미국이네’ 하게 된 더 큰 이유가 있었는데, 첫 날이었다. 숙소 앞의 해변에 앉아서 책을 보다가 햇빛이 너무 강해서 호텔 안쪽으로 들어와 로비 옆 복도의 소파에 다시 자리를 잡았더랬다. 그곳은 마침 호텔의 사무실 바로 옆이었고, 그 안에서 노련해 보이는 나이 든 여사원과 당돌해 보이는 젊은 동양계 여인이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하고 있었다.
둘의 목소리가 꽤 커서 의도하지 않게 대화를 엿듣게 되었는데, 한창 호텔의 직원이 손님에게 빌라의 멤버십을 권유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대화가 너무 미국스러운 거다.
‘최근에 여행 다녀오신 나라 세 개는 어디예요?’
‘앞으로 5년 이내에 가보고 싶은 나라는요?’
‘우리 호텔에서 마음에 들었던 것 세 가지만 말씀해주실래요?’
‘그거 정말 좋은 질문이에요!’
‘이건 정말 좋은 투자예요!’
미국에 있을 때 근처에 살던 친척도 만나기만 하면 ‘미국에 와서 생활하며 느꼈던 한국과는 다른 것 세 가지는 뭐야?’,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즐거웠던 경험을 세 개만 이야기해봐’ 같은 질문을 해댔는데, 영어로 말하는 것도 편치 않은 데다가 딱히 기억나는 것도 없어서 매번 대답하기 짜증났었다. 이번에도 ‘샌프란시스코에서 맘에 들었던 식당 세 개를 말해봐’하는 바람에 난처했었는데, 난 그냥 식당 이름 세 개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어쨌든 이 젊은 여자도 보통이 아닌데, - 이런 건 전혀 미국인 같지 않지만 - 저런 질문에 딱히 대답하지 않고 다시 받아치면서 계속 대화를 이어나간다.
‘글쎄요. 기억이 잘….’
‘당신은 어디가 가보고 싶어요?’
‘욕실에 전신 타월이 다른 곳보다는 조금 적은 것 같아요.’ <- 심지어 단점을 말함
‘알아요(I know).’
‘좋은 투자의 기준이 뭐예요?’
이런 식이다. 너무 재미있어서 책을 보고 있다는 것조차 잊고 듣고 있는데, 이 여사원은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잠깐 기다려달라고 하더니 응원군을 데려온다. 경력이 오십 년은 되어 보이는 흰 콧수염의 할아버지였는데, 화석 같은 표정으로 묵묵하게 숫자를 제시하며 능숙하게 풋내기 여인을 공략해 나간다. 한참 이야기하고 나서는 정말 미국다운 한마디로 클로징을 하는데,
‘허허! 그럼 오늘 저녁 당신의 남편을 놀라게 해 줄 준비가 되셨나요?’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그 할아버지에게 그녀는 십 초도 생각하지 않고 답을 던졌다.
‘호호! 정말이에요. 제가 지금 계약을 하고 저녁때 남편을 만나면 그이가 그야말로 놀라 자빠지겠는데요?’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 여사원과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며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건네는 그녀.
‘이태리 호텔 사진은 정말 최고였어요!’
그거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