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샌프란 생존기
한두 달 살았다고 이제 어느 정도 살아가는 패턴이 생겼고, 생활에 관련된 일들이 끼어들어 정신없이 돌아가는 날도 생겨버렸는데, 바로 토요일이다.
먼저 아침 일찍 일어나 청소를 한다. 샌프란시스코의 날씨는 청명하고 깔끔해서 먼지 하나 없을 것 같지만, 방청소를 해보면 노숙자 엎어져 있는 길바닥보다 먼지가 더 많다. 스위퍼로 슥슥 먼지를 제거하고, 다시 물걸레로 바닥을 청소해주면 된다.
다음은 요즘 꽤 즐기고 있는 빨래. 모아두었던 빨래들을 세제와 함께 이케아 비닐백에 넣어 다섯 블록 떨어져 있는 코인세탁방으로 천천히 이동한다. 이제는 꽤 많이 가서 이전처럼 길을 잃지 않아. 한 번에 도착한다. 세탁기 문을 연 후 빨래를 때려 넣고는, 기기 상태가 괜찮은지 상태창을 확인—고장 난 기기가 꽤 많으므로 빼먹으면 안 됨—한다. 세제를 흘려 넣어준 후 세탁 카드를 긁어주면 세탁기는 경쾌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빨래가 진행되는 동안 아침에 먹을 빵을 사러 필모어로 내려간다. 영화나 책에서 보면 키 만한 바게트나 먹음직스러운 빵들을 그렇게들 들고 다니던데, 이 근처에 산지 한 달이 다 되어가지만 나는 도대체 빵집 하나 발견할 수가 없다니. 그런데, 궁하면 통한다고 빵집은 아닌데 다 쓰러져가는 베이글 집이 하나 있다. ‘Noah’s New York Bagles’가 그것이다. 베이글은 뉴욕이 원조인 건가 싶었지만, 순두부도 북창동이 원조는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은 꽤 많은데, 기다리는 게 제일 싫긴 하지만 토요일 아침이니 이 정도는 참을 수 있다. 어차피 빨래도 15분은 더 돌아야 한다.
줄은 금방 줄어든다. 대충 먹고 싶은 베이글 몇 개, 메이플 크림치즈, 커피 케이크와 에그 베이글 샌드위치를 주문했는데, 점원이 못 알아듣는 것이 나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젊은 청년이었는데 의사소통도 잘 못하고, 포스를 조작하는 것도 굼떠 터졌다. 그래도, 여기저기 움직이며 내가 주문한 것들을 주섬주섬 담아 손에 쥐어 주는데 왠지 짠했다.(못할 것 같았음)
스타벅스에서 커피까지 사들고 다시 코인세탁방으로 향한다. 완료되어있는 빨래를 위쪽의 건조기로 옮기고 카드를 두 번 긁어준다. 16분 동안 최고 고열로 건조하겠다는 의지다. 매장의 의자를 바깥으로 끌고 나가 앉아 길바닥을 보며 조금 빈둥거리다 보니 건조도 어느새 완료가 되었다.
이케아 비닐백에 빨래를 담아 가려는데, 옆을 보니 어떤 사람이 테이블 위에서 건조된 빨래를 착착 개고 있다. 그 장면을 보니 건조기는 빙글빙글 돌기 때문에 건조를 마친 직후에는 옷에 크게 주름이 없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렇다면 집에서 빨래가 모두 쭈글쭈글했던 것은 비닐 백 안에서 눌렸기 때문인 건가? 여기서 빨래를 개면 다림질 같은 건 안 해도 될 것 같다.
그 옆에서 나도 빨래를 개기 시작했는데 한 세 개 개니까 너무 귀찮다. 귀찮은 건 둘째 치고, 속옷까지 개려니 왠지 민망해진다. 조금 개다가 다시 집어넣는 건 또 너무 허술해 보여서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이 되니 피곤해져 버렸다. 그냥 가기로 결정하고는 비닐백에 빨래를 담는데, 그 사람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아무나 나처럼 남 앞에서 팬티를 아무렇지 않게 갤 수 있는지 아니?'
정말 그건 쉬운 일은 아니다. 왠지 패한 느낌으로 조금 위축되어 집으로 가서는 마른 옷은 개고, 아직 덜 마른 옷들은 마저 마르도록 미리 청소해 놓은 바닥에 죽 펼쳐 놓았다. 나는 뭔가 조금 젖은 옷을 그대로 개지 못하는 깔끔한 성격인 것이다. 왠지 그대로 옷장에 넣으면 곰팡이나 숙주나물 같은 것이 자랄 것 같으니까.
대충 정리해놓고 다시 한인마트에 간다. 그곳은 집에서 8~9블록은 떨어져 있기 때문에 날이면 날마다 가는 곳은 아니다. 사실 다른 마트도 있기 때문에 특별히 그곳을 갈 필요는 없지만 아무래도 한번 문 닫았다가 다시 오픈한 곳이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은 사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오늘은 쌀을 사려한다. 가서 이전에 샀던 조막 만한 일본 쌀과 옥수수 수염차를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음료수는 3.9불이고, 쌀은 6.9불이에요."
아주머니가 계속 말씀하신다.
"그런데, 왜 그 쌀을 사? 저기 ‘그린 쌀’을 사요. 양이 훨씬 많아."
갑자기 반말을 하신다. ‘그린 쌀’이라니. 난 흰쌀을 먹고 싶은데. 그쪽을 보니 옛날에 흥부가 지고 갔던 쌀가마 정도 크기의 쌀이 있었다. 상표가 ‘그린 쌀’이었다. 나는 아직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아주머니는 계속 말씀하신다.
"쌀 똑같아. 일본 쌀이 초밥 쌀이라고 프리미엄 쌀이라고 하는데, 난 똑같더라고. 저건 7.9불인데 양은 네 배야!"
내가 보기엔 열 배다. 이럴 수가 있는 건가 진짜. 1불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말이다.
"일본 쌀 사는 사람들은 바보야. 저렇게 조금밖에 안 들어있는데. 저걸 사요. 아주 좋아.”
뭔가 등 떠밀려 구매한 ‘그린 쌀’을 어깨에 메고 가게 밖으로 나올 때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아주머니 말대로 쌀이 뭐 별다를까 싶고, 한인마트에 오길 잘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날씨도 좋고 오늘 해야 할 일들도 다 마무리되었으니 쌀을 들고 즐거운 기분으로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가는 도중 이 쌀이 왜 7.9불인지 알 것 같았는데,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진짜 가는 도중에 몇 번 집어던지고 싶은 것을 꾹 참았는데, 쌀이라는 게 이렇게 무거운 것인지 처음 알았다. 앞으로는 평생 조그만 쌀을 사야겠다고 다짐했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하던 말던 계속 어깨와 팔목을 파고드는 쌀가마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내 몸의 일부를 잠식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