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오늘 날씨는 맑음
살짝 비가 내려서 그런지 어둑어둑해진 저녁 시간이 평소보다 더 아늑했다. 천천히 집으로 가서 샤워를 한 후 맥주를 들고 텔레비전 앞에 앉으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은 그런 날. 머리를 비우고 시선을 고정시킬만한 방송을 찾지 못한다 해도 마침 - 다음이 궁금한 - 읽던 책도 있으니, 오늘은 무조건 행복한 저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즐거운 시뮬레이션을 하며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메시지가 온다.
'오늘 소맥 한잔 어때?'
오랜만에 친구가 한잔 하잔다. 이미 행복해질 수밖에 없는 계획이 있는 상황이라 고민이 됐지만, 오랜만에 갑자기 온 연락이잖아. 나름 술을 한잔 하며 풀어야 할 스트레스가 있는지도 모른다. 꽤 오랫동안 고심해서 작성해 올린 기획안이 본론에는 진입도 못한 채 난도질당했거나, 오랜만에 새 옷을 입고 출근했는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오늘 왜 그렇게 후줄근하냐는 이야기를 들었을 수도 있지. 엘리베이터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열 배는 더 창피하니까. 그런 때는 위로가 필요한 법이다. 물론 그냥 소맥이 너무 마시고 싶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소주와 맥주가 둘 다 너무 마시고 싶었다거나.
평소에 친구를 제대로 챙기는 성격도 아닌데, 이런 호출에도 반응하지 않는다면 난 정말 나쁜 놈 아니야? 오늘이 아니라도 저녁은 매일 찾아오고, 비도 연간 70일은 내리는 것이다.
'아 나도 오늘 삼겹살이 먹고 싶었는데!'
사실 배가 불러 저녁은 건너뛸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왕에 반응할 거면 텔레파시가 맞아떨어졌다는 느낌이 들도록, 그래서 갑자기 호출한 것이 조금은 덜 미안하도록. 나는 좋은 친구니까.
'아.'
'응?'
'아니다. 그냥 집에 가서 잠이나 자야겠어.'
뭐라고? 이게 무슨 개소리지? '네가 바로 제안해도 술 약속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한가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나는 역시 너와 함께하는 것보다는 집구석에 가서 편하게 잠이나 자는 편이 더 행복하겠어.'라는 건가? 차라리 내가 누군가에게 한잔 하자고 했을 때 '싫어. 너랑 마시느니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겠어.'하는 소리를 듣는 게 더 낫겠어. 적어도 그 경우 노타임으로 버르장머리 없이 술 약속 승낙 권유를 시전 한 건 나니까.
'아. 응 그래.'
이건 정말 후련하게 받아쳐줄 말이 전혀 없는, 세상에 몇 안 되는 상황 전개 중 하나 아닌가?
그 후 나는
집에 와서
씻고
맥주를 깐 후
텔레비전 앞에 앉았지만,
기분이 매우 별로였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