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prilamb Aug 29. 2019

장대비와 '운명’

서울, 오늘 날씨는 맑음


하늘은 낮에 비가 와서 그런지 선분홍색 유리처럼 맑았다. 건물 밖으로 나서니 선선한 바람이 얼굴 옆으로 훅 지나갔다. 아직 가을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여름은 아니다. 나는 고개를 들고 심호흡을 했다. 낮에 스마트 워치가 심호흡을 하라고 알림을 보내왔지만 무시했더랬다. 건물을 나서면 나도 모르게 관대해져서 놓쳤던 무생물과의 약속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는 사람이 된다.


지하철에는 사람이 많았다. 이 시간은 늘 사람이 많은 때라 앉아본 적이 없는데, 앞에 앉아있던 꼬맹이가 스프링처럼 자리에서 튀어 일어났다. 앉았더니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동네 도서관에서 빌린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꺼내 들었다. 삼일째 가지고 다니는 중인데 아직 서른 페이지도 읽지 못했다.

일대기적인 소설은 스케일만 크고 디테일이 떨어지는 것이 많아 피하는 편인데, 이 책은 거기에 주인공은 범생이인데다가 문체까지 건조했다.

책에 시선을 고정시키려니 지루해서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다. 나는 미련 없이 책을 다시 메신저백에 집어넣었다. 취향이 아닌 책을 끝까지 들고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딱히 책에 미안할 필요는 없는 게, 나는 보다 만 드라마도 꽤 많은 것이다.


역에 도착해서 바깥으로 나왔더니 벌써 하늘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근처 동네 도서관에 들러 ‘스토너’를 미련 없이 반납하고, 상호대차 신청을 해두었던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을 받아 내려왔다. 얼마 전 서점에 책이 없어 구매를 못했을 때, 바로 도서관 앱을 검색해서 대출신청을 해두었었다. 책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낡아서 좋았는데, 왜 인지는 모르겠다. 물론 더러운 것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다.


밖으로 나오니 다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을 정도여서, 내리는지도 모르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사람도 있다.  


‘책이나 조금 읽다가 들어갈까?’


동네에 있는 작은 카페는 한쪽 벽이 모두 통유리여서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면 바로 내리는 비를 구경할 수도 있다. 음료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으니 갑자기 비가 후드득 하며 요란하게 내리기 시작했다. 책을 꺼내 놓고는 펼치지도 않은 채 쏟아지는 비를 구경했다.


‘스토너 도입부보다 훨씬 다이내믹한걸?’


아마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보다도 그럴 것이다. ‘운명’은 꽤 유명하기 때문에 읽지는 않았어도 꽤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

정신없이 내리던 비는 천천히 잦아들더니 이내 멈춰버렸고, 카페 바깥쪽 아스팔트는 카페의 조명을 받아 밤하늘처럼 반짝거렸다.


‘달그락달그락’


작은 카페에서는 소리만 듣고 있어도 내 음료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일은 금요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게으름의 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