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샌프란 생존기
서울에서는 약속이 생기면 늘 아슬아슬하게 도착하는 편이었다. 할 일이 없어도 왠지 미적미적 컴퓨터 한번 켰다가 냉장고 한번 열었다가 하면서 일찍 출발하지 못하는데, 결국 대부분 정각에 도착하던지 혹은 5분 정도 늦게 도착하게 된다. 물론 사람들은 좋아할 리 없지만, 그래도 버릇이라는 것이 쉽게 고쳐지는 것은 아니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샌프란시스코에 왔다고 서울 어디쯤에 버릇 주머니를 묻어두고 온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갑자기 부지런해질리는 없다.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 곳은 길을 모르니 우선 구글맵이나 시티 맵퍼 등으로 가야 할 곳과 방법을 먼저 확인해둔다. 똑 부러지는 성격도 역시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음. 한 블록 이동해서 뮤니(샌프란시스코 버스)를 타고 이동해서 차이나타운을 지나 세 블록 후에 내리면 되네. 역시 샌프란시스코라고 별 것 없군.'
정말 별 것 없다. 게다가 앱들은 정류장에 차가 도착하는 시간까지 다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늦게 도착하는게 더 여려울 것 같다. 이동수단과 방법이 명확히 정해지고 나니 역시 안심하게 되어 늦장을 부리게 되는데, 집이 작다 보니 딱히 할 것도 별로 없다. 시간을 보니 지금 나가면 10분 정도 일찍 도착할 것 같다.
조금 일찍 도착해도 되지 않을까?
왠지 일찍 나간다고 싫어하지는 않을 것 같다.
어슬렁 정류장 위치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샌프란의 망할 정류장들은 도대체 들쑥날쑥이라 하늘만 보고 다니면 이 곳이 정류장인지 그냥 인도인지 알 수가 없다. 표지판이 서있는 곳은 40%도 안되고 대부분 길바닥에 표시해두었으니 꼭 바닥을 보면서 걸어야 한다. 물론 바닥에도 표시가 안되어있는 경우도 종종 만날 수 있지만 말이다.
역시 계획했던 시간 안에 정류장에 도착했는데 버스가 오지 않는다. 5분이 지나도 10분이 지나도 오질 않아. 정류장에 기다리는 사람들로 축구팀을 만들어도 될 정도가 되니 그제야 버스가 언덕을 기어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힘들어 보여. 전기자동차의 비애인가. 그래도, 아주 가끔만 멈추니 괜찮다고 생각한다.
15분이나 지나 버스를 타게 되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정류장마다 다시 출발할 때 버스가 퍼져 버리는 것은 아닌지 조마조마하다. 가끔 아주 나이 많으신 어르신이 타게 되면 리프트를 내려 버스로 올려드리는데 그게 정말 시간이 엄청나게 걸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버스가 느리게 가던 정류장에서 오 분 동안 정차해 있던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늘 그래 왔다는 듯이 화석처럼 무표정하게 앉아 있을 뿐이다.
'이 정도면 괜찮네 뭐.'
정도의 표정을 하고서 말이다. 샌프란시스코의 뮤니는 한 정거장 한 정거장 쓰러지기 직전 늙은 하마처럼 한숨을 내쉬면서 전진하는데, 언덕이라도 지나갈 때면 뒤로 밀려 떨어질 것 같아서 정장 몇 명 데리고 차 뒤로가 힘 껏 밀어주고 싶을 정도다.
차이타 타운에 진입하자 타고 내리는 사람의 수가 서너 배로 증가한다. 골든게이트와 베이브리지 건설의 주역이었던 중국인들은 이제 모두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고, 그 이후 정착한 이 곳 샌프란시스코의 귀퉁이 차이나타운에서 영어 한마디 안 하고도 본토와 다름없이 따뜻한 날씨를 즐기며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이 분들의 즐거움이라면 역시 뮤니를 타고 두 블록 옆 친구네 집에 마실 가는 것이 아닐까. 덕분에 증가한 승객들 덕에 뮤니는 정차할 때마다 정류장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쉴 새 없이 리프트를 들었다 내렸다 하고 있다.
이미 약속시간은 십 분 이상 지났고 아직도 다섯 블록을 더 가야 하는데, 차이나 타운의 도로는 주차해놓은 차들이 이미 4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상태라 도무지 속도를 내지 못한다. 이 정도면 기다리는 사람은 분명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내려 뛰는 것과 택시를 타는 것의 시간 차이를 시뮬레이션해보고 있는데, 갑자기 도로 앞쪽에서 모든 차량들이 일제히 클락션을 울리기 시작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아!... 젠장
사람들 틈 사이로 버스 앞 창문 건너를 보니 일방통행 도로의 끝 쪽에서 차가 천천히 진입해 오고 있었다.
이 날은 정말 엄청나게 늦게 도착하고 말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약속에는 우버나 택시를 탈 것을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