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치지 않아'
얼마 전에 친구가 '해치지 않아'라는 영화를 봤는데 전여빈이 귀엽고 발랄해서 마음에 든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게 무슨 영화지? 전여빈 하면 '멜로가 체질'만 기억나는데..' 했죠. 그 드라마에서 그녀는 좀 어두운 캐릭터를 연기했어서 진지한 얼굴만 기억났거든요. 궁금했습니다. 웃는 얼굴은 어떨지 말에요.
그래서 영화를 봤지만 딱히 그녀의 웃는 얼굴이 많이 나오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나왔다고 하더라도 알아채지 못한 것을 보면 크게 인상적이지는 않았나 봅니다.
‘해치지 않아’는 안재홍이 끌고 가는 영화였는데 - 그러고 보니 그도 '멜로가 체질'의 주연이었네요 - 그의 연기는 재미있긴 하지만 살짝 오버스러운 면이 있어요. 일본 드라마 주인공처럼 연기한다고 할까?
이 영화는 동일 제목의 웹툰을 스크린에 올린 작품으로 올해 1월에 개봉했습니다. 한 로펌의 변호사가 망해가는 동물원을 맡아 경영하게 되는데, 빈 우리를 채우기 위해 직원들과 동물 탈을 만들어 쓰고는 동물인 척한다는 이야기예요. 말이 안 되는 것 같긴 하지만, 동물원이라는 게 멀리서 지긋하게 감상하는 구조라 막상 그런 상황이 되면 알아채기 힘들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네요. 어쨌든, 영화 속 관람객들은 북극곰이 앞에서 콜라를 까먹어도 전혀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그 부분이 영화의 분위기가 반전되는 지점인데, 너무 말이 안 되니까 몰입도가 훅 떨어지긴 하더라고요. 추천할만하냐고 물어본다면, 글쎄요?
영화 속에서 사자, 나무늘보, 곰, 고릴라는 의상과 탈을 만들고 사람이 직접 들어가서 연기를 하지만, 기린은 목 윗부분까지만 제작해서 우리 안쪽으로 얼굴만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기린의 고개가 끄덕끄덕 움직이는 정도만 관람이 가능했죠. 사실 동물원 하면 기린인데...
기린 이야기가 나오니 샌프란시스코에서 살 때가 생각나네요. 그곳 외곽에 엄청나게 큰 동물원이 있었거든요. 별생각 없이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그 이후로 한가할 때면 종종 놀러 갔죠. 그곳에서는 딱히 할 일도 없었으니까. 날씨라도 흐리면 정말 그렇게 넓은 동물원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까요?
사실 동물원이 다 비슷비슷하잖아요. 호랑이는 어흥, 사자는 야옹, 북극곰은 천천히 헤엄치고. 그런데, 딱 하나 입이 떡 벌어지는 광경을 선사했던 동물이 있었는데, 바로 기린이었어요. 처음 방문했을 때였나? 꽤 넓은 풀밭에 방목되고 있는 기린 떼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나무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나자 천천히 풀을 뜯어먹던 그들이 일제히 내달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일곱 개의 목뼈를 담고 있을 긴 목을 꼿꼿이 세운 채로 목의 갈기를 휘날리며 언덕을 내달리는 모습은 정말 품위가 넘쳤습니다.
동물원 하니 생각나는 영화가 하나 더 있는데요. 바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 (We bought a zoo)'입니다. 저는 책으로 먼저 읽었었는데, 그게 무려 실화였죠. 여러분 미국에서는 그런 게 가능하다니까요? 동물원을 사는 것. 어쨌든, 그 영화는 '해치지 않아'와 겹치는 부분이 무대가 동물원이라는 것 밖에 없는, 멧 데이먼 주연의 가족물입니다.(재미있으니까 추천은 살짝 해두고요) 영화를 본지 오래되어 주인공들이 가물가물해서 인터넷을 검색했는데, 맙소사 스칼렛 요한슨이 여주인공이었네요?
오래전에 에스콰이어지에서 스칼렛 요한슨의 표정연기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여배우의 상대적으로 부족한 표정 연기' 뭐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던 기억이 있네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녀의 표정이 정말 몇 없었거든요. (활자화된 정보는 고정관념을 뇌 주름 사이에 꾹꾹 심어주는 것 같아 무섭긴 합니다만.)
어쨌든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의 '스칼렛 요한슨'이 기억이 나지 않았던 건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라 무표정한 연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