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의 날'을 아시나요?
서울, 오늘 날씨는 맑음
오늘이 세계 피아노의 날이라는 걸 아셨나요? 나는 당연히 몰랐다.
아침을 먹으러 나갔는데 생각보다 싸늘해서 자전거 타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들어와서는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어떤 음악을 들을까 뒤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추천 플레이리스트 중 하나의 이름이 ‘세계 피아노의 날’이다. 사실 세상에는 별의별 기념일들이 다 있기 때문에 - 심지어는 고양이의 날이 있다. 더 놀라운 건 나라마다 날짜도 다 다르죠. - 피아노의 날이라는 게 없다면 더 이상할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왠지 그 기원이 궁금해져서 인터넷을 검색해봤다.
그랬더니 맨 위쪽에 ‘세계적인 클래식 레이블 도이치 그라모폰(DG)이 오는 28일 세계 피아노의 날을 맞아 온라인 콘서트를 개최한다.’는 기사를 시작으로 여러 레코드 레이블들이 유/무료로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피아노 콘서트를 개최한다는 소식이 가득했다.
‘아, 오늘이 피아노의 날이어서 그 플레이리스트가 최 상단에 위치하고 있었구나.(너무 당연한가?)’
하지만, 아무리 검색어를 변경하고 스크롤을 끝도 없이 내려봐도 ‘피아노의 날’에 대해 속 시원한 설명을 해주는 페이지가 없었다.
다시 이번에는 검색어를 영문으로 바꿔서 외국 사이트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는데 그쪽은 기사들이 꽤 많다. 그런데, 희한하게 기념일이 3월 29일이라고 하는 기사도 있고, 3월 28일이라고 하는 기사들도 있다. ’ 29th March will be World Piano Day..’ 같은 타이틀로 시작하는 기사 밑에 ’ 28th March! World Piano Day!!’라는 기사가 있는 식이다. 아무리 유명한 날이 아니라 해도 날짜를 헛갈리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피아노 날의 공식 페이지인 pianoday.org 내의 설명을 보고 나니 그 의문이 풀렸다.
Piano Day, a annual worldwide event founded by a group of likeminded people, takes place on the 88th day of the year – in 2020 it’s the 28th March – because of the number of keys on the instrument being celebrated.
피아노의 날은 피아노의 건반 수(88개)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그해의 88번째 날을 피아노의 날로 지정하고, 이를 축하한다고 한다. 그리고, 올해는 3월 28일이 88번째가 되는 날이다. (누가 뭐래도 2월은 인류 전체를 혼돈 속에 몰아넣는 달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처음 이 아이디어를 제창한 사람은 독일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자인 Nils Frahm이라고 하는데, 그는 클래식 피아노곡을 일렉트릭 피아노 등의 퓨전악기를 사용해서 재구성하는 크로스오버 재즈 음악가라고 한다. 피아노의 날이라면 왠지 악기라고는 고전 피아노 밖에 모르는 순수 정통 클래식 전공자에 의해 주창되었을 것만 같았는데 말이다. 그래도, 행사에 참여하는 아티스트들이 정통 클래식 전공자부터 퓨전 재즈 음악가까지 다양한 것을 보면 뮤지션들은 정치가들보다는 순수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행사도 다 돈이 되긴 할 테지만.
어쨌든 정보를 얻기 위해 검색으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던 것이 무색하게 pianoday.org 에는 피아노의 날에 대한 모든 정보들이 차곡차곡 잘 정리되어 있었다. 할 일이 더럽게 되게 없는 분이라면 이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올해 기획되어 있는 여러 공연이나 리사이틀의 화려한 라인업을 구경하거나, 작년 혹은 재작년 피아노의 날 플레이리스트를 사운드 클라우드에서 하나하나 들어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나도 생각 없이 들어갔다가 두 시간이 훌쩍 지나버리고 말았다.)
사실 얼마 '전 놀면 뭐하니?'에서 손열음 씨의 터키행진곡 변주를 들으며 온 몸이 굳어 연주 끝날 때까지 숨도 제대로 못 쉬었던 기억이 아니었으면 '피아노의 날' 같은 플레이리스트는 그냥 건너뛰었을 텐데 말이죠. 그걸 보시면 프로의 세계는 멋진 게 아니라 무섭다는 걸 느끼실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