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03
‘계단을 계속 올라갔어요.'
대충 올려다봐도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이었다고 했다.
'손을 잡고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갔다니까요.'
깨는 순간까지도 꿈이라고 생각 못 했단다.
'정말 실제 같아서 깨고 나서는 한참 동안 멍하니 있었어요. 일어나지도 못했어.'
....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건 아마도 대학교 졸업 후 이 년쯤 지난가을이었던 것 같다. 어느 정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때 그녀를 만나기 위해 꽤 노력을 했었기 때문이다. 알고 있던 연락처로는 연락이 되지 않아서, 같이 졸업했던 친구들에게 물어물어 겨우 바뀐 연락처를 알아냈었다.
집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서 알아낸 새 번호로 연락을 하는데, 통화 신호가 반복되는 동안이 그렇게 길었다. 혹시 잘못된 전화번호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통화 신호는 땅끝으로 사라졌고, 수화기 건너편은 마치 블랙홀인 것처럼 적막했다.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우리는 침묵했다.
'... 오빠?'
그녀가 내 번호를 모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학교를 다닐 때에는 친하다면 친했으니까. 우리는 다른 친구들보다는 좀 더 친했지만,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다. 물론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지만, 나는 그걸 바깥으로 내보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그런 성격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내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녀는 내 번호를 알고 있었다.
며칠 후, 우리는 오랜만에 학교 근처에서 만나 엄청나게 많은 술을 마셨다. 그리고, 마시는 내내 학교 때 이야기를 했다. 누가 더 많이 기억하고 있는지 내기라도 하듯이, 우리는 번갈아가면서 서로에게 기억나는 것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나는 왜 전화를 했는지 말하지 않았고, 그녀도 왜 전화를 해왔는지 묻지 않았다. 내가 물어오면 대답할 생각이었던 것처럼, 그녀도 내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렸을까? 아니 어쩌면 그런 건 궁금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그 자리에서 계속 마시며 떠들다가, 어느 순간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나는 그쯤부터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까스로 개찰구를 통과한 나는 역내 의자에 누워 정신을 잃었고, 그녀는 밖으로 나가 술 깨는 약을 사서는 내 옆에 놓아주고 열차를 탔다. 다른 것은 잘 모르겠지만,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열차 쪽으로 걸어가던 그녀의 희고 긴 다리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 이후 우리는 꽤 오랫동안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고, 어제 다시 그녀에게 전화가 온 것이다.
...
'끝까지 올라갔죠. 되게 오래 걸렸다니까요?'
끝까지 올라갔냐는 질문에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갑자기 그 꼭대기에 뭐가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깰 때까지 현실 같았다고 했으니 샹그릴라나 엘리시움 같은 곳은 아닐 것 같지만, 끝도 없는 계단부터 이미 현실성이 떨어지니 확신할 수는 없다.
'그건 이야기하지 않을래요. 혼자만 알고 있을래.'
꼭대기에 뭐가 있었는지도 궁금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십 년 만에 내게 전화를 한 이유가 훨씬 더 궁금했다. 하지만, 그건 물어볼 수가 없다. '꿈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요.'라고 한다면 실망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때 그녀가 내게 연락해 온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동안 그 질문을 가슴속에 묻어두고 있었구나. 나도 연락했던 이유를 늘 머릿속에서 혼자 답하고 있었다. 더 이상은 십 분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너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왜 나한테 전화한 이유를 안 물었어?
'네? 아. 그냥 그다지 궁금하지 않아서요.'
.... 이게 아닐 텐데? 나는 순간적으로 판단력이 흐려졌다.
-... 그, 그래? 그럼 오늘은 왜 전화한 거야?
'꿈 이야기를 들려주려고요.'
-....
나는 그 대답을 듣는 순간, 계단 꼭대기에 뭐가 있었는지는 죽을 때까지 묻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