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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prilamb Jun 21. 2020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서울, 오늘 날씨는 맑음



며칠 동안 한여름 같았는데 오늘 아침은 조금 선선해서 더워지기 전에 천천히 자전거를 끌고 집을 나섰다. 강변 길을 따라 근처 공원에 가기 위해서다. 아직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가는 길에도 사람이 별로 없고, 도착한 공원 주변 매장들도 아직 어젯밤 분위기 그대로 잠들어 있다. 아침 일찍이라면 갈 곳이 스타벅스 밖에 없는 건 샌프란시스코나 서울이나 마찬가지다.

공원 근처를 서너 바퀴 돌고는 딱히 다른 할 일도 없어 다시 왔던 길을 따라 페달을 밟았다. 집에 도착해서 현관을 들어서니 벌써 거실에 오후 햇살이 가득했다. 씻지도 않고 바로 햇살을 등지고서는 바닥에 누웠는데, 조금 피곤했는지 바로 잠이 들어 버렸다. 눈을 뜨니 오후 세 시. 미세먼지 앱을 켰더니 먼지 상태를 나타내는 이모티콘 입꼬리가 귀에 걸려 있다. 이렇게 깨끗한 공기는 꽤 오랜만이다. 바로 일어나서 집 안의 창을 하나하나 모두 열고는, 뜨거운 물이 든 커피잔을 들고 식탁에 앉았다. 얼마 전 공원 옆 카페에서 사 온 커피백을 마셔보기 위해서다. 나는 찬장에 넣어 두었던 커피백을 꺼내어 커피잔에 담갔다.


‘커피백은 드립백하고 조금 달라서 뜨거운 물에 오래 담가 두셔야 해요. ‘아, 이 정도면..’ 하는 생각이 드실 때, 그만큼을 더 기다리세요.’


포스의 점원은 생긋 웃으며 종갓집 할머니가 부뚜막 앞에서 요리에 집어넣는 소금의 양을 전수하듯 이야기했었다. 나는 그녀의 말대로 커피백을 잔에 담가 둔 채로 꽤 오랫동안 앉아있었다. 은은한 커피향이 천천히 주변에 흩어진다. 기다리는 동안 열린 창에서는 다시 바람이 불어 들어왔고, 동시에 주방 쪽 창에 걸어 둔 풍경이 청아한 소리를 냈다. 석고로 만들어진 열대어 밑에 가는 세 개의 쇠 막대가 달려있는 그 풍경은 오래전 발리에서 사 왔는데, 지난주에 창고 정리를 하다가 발견하고는 다시 창 앞에 걸어 두었었다. 바람이 한번 더 휙 불자, 열대어 지느러미 밑으로 풍경소리가 흩어진다.

풍경소리를 들으면 두 가지가 생각나는데, 하나는 2014년의 여름 초입에 교보문고에 걸려있던 글판이다. 정호승 시인의 '풍경 달다'라는 시의 일부를 담고 있었는데, 요즘도 가끔 그쪽을 지나게 될 때면 이 시구詩句가 기억나서 건물 쪽을 돌아다보게 된다.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현판에는 모두 나와있지 않지만, 그는 그 시에서 절에 다녀오면서 그리운 사람의 가슴 처마 끝에 풍경을 달아 두었다고 했다. 그의 마음이 전달되어도, 혹은 그냥 산들바람이 불기만 해도 풍경은 울릴 테니 글쓴이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게 없는 표현이다. 멋스러움 뒤에 숨어있는 효율성에 감탄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꽤 오래전에 봤던 ‘호타루의 빛’이라는 일본 드라마다. 여자 주인공이 귀여웠던 드라마인데(남자 주인공은 기억나지 않음), 그녀는 회사 일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와서는 툇마루에 앉아 맥주를 마셨고, 그 순간에는 늘 처마 밑에 걸려있던 풍경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 이후로는 어디서든 풍경소리를 들으면 그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툇마루에 앉아있던 장면이 떠오르고, 맥주가 마시고 싶어 졌다.


나는 커피잔을 옆으로 밀어 두고는, 냉장고에서 사둔 지 오래된 맥주를 하나 꺼냈다. 다시 주방 쪽 창문에서 바람이 훅 밀려들어오자 풍경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고,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코로나만 아니면 완벽할 텐데...’

풍경 소리와 함께 주말이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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