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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prilamb Jul 24. 2020

백수의 사생활

서울, 오늘 날씨는 맑음


최근 백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코로나 덕분에 외국에 다녀오기도 힘들게 되었고, 지방도 바이러스가 창궐한다니 국내 여행도 애매했다. 물론 코로나 상황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여행 자체를 싫어하는 성격에 그런 준비를 하고 비행기에 올랐을지는 잘 모르겠다. '등 떠밀려서 말고 스스로 여행을 가본 적이 있나요?' 하고 물어본다면, 자신 있게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뭔가 에너지가 넘쳐서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대충 시작하면 아마 집에서 유튜브만 잔뜩 보다가 시간이 훌쩍 가버릴게 뻔했다. 마치 주말이 그렇게 지나는 것처럼. 그런 이유로 나는 하고 싶은 것. 아니, 하고 싶지 않아도 꼭 해야 할 것들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 취미는 시험 기간에 시험공부 계획을 세우는 거였다. 어렸을 때는 노는 것 말고는 별다른 일이 없었기 때문에, 계획까지 세워가면서 할만한 게 딱히 없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험 기간만 되면 세상을 설계하는 아키텍트가 된 것처럼 시험공부 계획을 수립했다. 그때는 내가 만들어 놓은 시험공부 스케줄을 보면서 스스로도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일정이 얼마 안 남은 상황에서도 이렇게 모든 과목을 적절히 터치한 스케줄을 만들어낼 수 있다니!’ 하면서 나 자신을 기특하게 여겼다. 물론 공부를 제대로 할 리가 없으니 또 날마다 스케줄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변경된 스케줄 또한 너무 합리적이어서 공부를 안 했어도 전혀 시험이 걱정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먼저 말해 두고) 나는 백수 생활을 앞둔 상태에서 책상에 앉아 달성해야 할 목표들을 하나하나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시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꼼꼼하게 항목들을 나열하다 보니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 '내가 얻고 싶은 게 이렇게 많았나?' 하며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들이 차곡차곡 스케줄 안에 놓이는 모습을 보니 다시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이 계획이 이행되고 나면 나는 지금보다도 한층 더 뛰어난 인재가 되어있을 것만 같다.(계획은 잘 세워도 시험을 제대로 봤던 적이 드물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어쨌든, 어렸을 때는 계획만으로도 만족했지만, 지금은 이행해야 할 것 같다는 어른스러운 생각이 드는 것도 뿌듯했다. 한층 성장한 나를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 드니까.


그래서 백수생활을 시작하게 된 날부터 계획 이행을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서기 시작했다. 약간 어둑어둑할 때 집을 나서면 기분이 묘하게 청량하다. 아침에 혼자 걷는 길은 밤에 혼자 걷는 길과는 느낌이 완전히 다른데, 아무 발자국도 없는 눈밭에 첫발을 내딛는 기분 같다고 할까?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 걷다 보면 '오늘도 열심히 해야지'하는 생각이 절로 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살 때도 그랬다. 그곳은 버스가 갑자기 삼십 분씩 지연되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발생하기 때문에, 나는 늘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안개가 가득한 거리를 걸어 정류장에 가서 아무도 없는 버스를 타고 목적지 근처에 도착하면, 남은 시간 동안 늘 목적지 근처의 스타벅스에서 시간을 때웠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새벽에 문을 여는 매장은 스타벅스 밖에 없다.


새벽 어둑어둑한 거리를 걷다가 안개 사이로 불빛을 봤다면 그곳이 스타벅스 매장 입구라고요! 아니면, 화재가 났거나...’


이건 정말이다. 나는 그런 스타벅스 안에 들어가서는 간단히 샌드위치와 커피를 시켜놓고 책을 보거나 랩탑으로 인터넷을 했었는데, 그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서울도 새벽에 집을 나서면 주변에 문을 연 매장이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 스타벅스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는 아직 혼자서 독점하고 있는 그 장소에서 계획해 두었던 스케줄을 천천히 이행하기 시작한다. 이건 정말 요즘에 알게 된 사실인데,


계획을 차곡차곡 이행하는 것도 계획을 멋지게 세우는 것만큼 뿌듯하다는 것.


이미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안 것 같기도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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