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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prilamb Aug 10. 2020

평화로운 주말 스케치

서울, 오늘 날씨는... 비



TV 리모컨의 고장

세 달쯤 전부터 TV 리모컨의 왼쪽 방향키가 잘 눌리지 않았다. 말하자면 유튜브 메인화면에서 콘텐츠를 내비게이션 할 때, 오른쪽으로 한번 넘어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덕분에 세 달 동안 커서를 오른쪽 콘텐츠로 넘길 때마다 마치 반품불가 물건의 주문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게 - 누구라도 공감하겠지만 - 인생에 있어 신중해야 할 일은 아니라 꽤나 스트레스였다. 누르다 보면 버튼이 두 번 눌릴 수도 있잖습니까? 그렇게 가끔, 즐겨보는 '솔라시도' 채널이나, 아이유의 '집콕 시그널' 혹은 '스피카 스튜디오'의 새 콘텐츠를 그냥 넘겨버리게 되면 엄청난 짜증이 밀려왔다. 다시 선택해보려고 홈버튼을 누르면 전체 콘텐츠가 리프레시되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그녀들의 콘텐츠. 리모컨 따위가 감히 내게 이렇게 고통의 시간을 선사하다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리모컨의 분해

그래서, 리모컨을 분해하기로 결심했다. 뜯으면 고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면 이과생이 아니지. 여덟 개의 걸쇠를 손톱으로 동시에 누르면서 힘들게 리모컨을 열었는데, 시험공부를 안 한 상태로 받은 시험지를 앞에 둔 것처럼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대충 알코올 솜으로 기판을 닦고는(그게 뭐야?) 다시 닫으려는데, 갑자기 중앙 버튼과 기판을 연결해주는 필름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책상 위에 리모컨 앞 면을 뉘어둔 채로, 한 손으로는 기판을 들고, 이빨로는 터치용 고무판을 고정시키면서, 다른 한 손으로 터치 버튼에 필름을 연결하려는데, '이게 정말 가능한 건가?' 하는 생각만 계속 든다. 그렇게 사십 분 동안 온몸에 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겨우 뚜껑을 닫았는데, 테스트해보니 이번에는 오른쪽 버튼이 눌리지 않는다.

그렇게 세 시간 동안 부들부들 떨며 뚜껑을 수십 번 분해/조립하다가, 문득 '내가 이 코로나 시대에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틀림없다. 그 순간 나는 이가 맞물려 있어 열 때마다 손톱이 뽑힐 것 같은 고통을 받아야만 했던 리모컨 뒤판을 아작 내고, 남은 리모컨 기판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이 리모컨은 삼성의 화성 공장에 있는 손이 네 개인 외계인들이 쪼물쪼물 조립해 오는 것임에 틀림없다니까? 도저히 인간이 두 개의 손으로 분해/조립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닌 것이다.


리모컨의 재구매

나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삼성 리모컨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진작 이럴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십 분을 뒤져 겨우 가장 비슷한 제품을 찾아 주문하려니, 9월 중순에 도착한다고 한다. 그동안 집콕 시그널의 귀여운 콘텐츠나 스피카 스튜디오가 전달해주는 음모론을 끊어야 한다는 건가? 어쨌든, 방법이 없으니 주문을 넣어두고 리모컨 부스러기 청소를 하고 있는데, 쿠팡에서 갑자기 '혹시 이 물건을 찾으셨나요?' 하는 알림이 왔다. 그것은 삼성 기기 전체에 호환되는 리모컨이었는데, 오늘 주문하면 내일 도착하며 심지어 가격도 더 쌌다. 이런 게 인공지능인 거지. 도대체 인더스트리는 왜 언더 피팅 리스크가 충만한 Fraud Detection 같은 것에 열을 올리고 있는 걸까? 주문하기 전에 알려줬으면 더 좋았겠지만, 쿠팡은 취소도 잘 된다. 먼저 주문했던 리모컨을 취소하고 다시 쿠팡이 제시해준 상품의 주문 버튼을 누르자, 이런 알림이 떴다.


'로켓 배송 물품이라 8천 원 더 주문하셔야 합니다.'


쿠팡의 로켓 배송 서비스의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위한 최소 구매 규칙에 미달인가 보다. 그래서, 에어팟 프로 케이스나 사볼까 하고 검색을 했는데, 세상에는 엄청난 수의 에어팟 프로 케이스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짜장면과 짬뽕 중 하나를 고르는 것도 어려운데, 이렇게 많은 선택지에서 하나의 케이스를 골라낸다는 건 내게 거의 불가능한 일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 시간 정도 무섭게 집중해서, 결국 내 품위와 성격, 그리고 취향에 어느 정도 가까운 제품을 골라낼 수 있었다. 함께 주문을 넣고 나서 시간을 보니, 벌써 주말이 다 가고 있었다.


하지만, 대범하게


'어차피 비가 와서 할 일도 없었는걸 뭐...'


하고 말았다는 이야기.



도착했슴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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