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delaide Son Dec 21. 2021

나의 기저귀 이야기

어느덧 생후 40일에 접어든 둘째는 벌써 5킬로가 육박하기 시작했다. 신생아 기저귀를 떼고 다음 단계 기저귀로 사이즈를 키워주다가 생각해보니, 큰아이의 몸무게가 10킬로에서 15킬로가 되는 동안 한 번도 기저귀 사이즈를 키워주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사용하는 기저귀가 해당 라인 기저귀 중에선 가장 큰 사이즈, 17킬로까지 쓸 수 있다는데 허벅지가 통통한 큰아이는 고새 그게 작아지고야 말았다.


사실 아기를 키우기 전까지만 해도 서너 살짜리 아이가 기저귀를 하고 다닐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나의 이 우량한 아들은 세 돌을 불과 네 달 앞두고 있으나 절대 기저귀를 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가끔 sns에서 덩치 큰 아이들이 기저귀 차고 있는 걸 보면 엄마의 게으름을 비웃었던 과거의 나 자신에게 참으로 부끄러운 일. 나라고 게으른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보지 않았겠는가. 유명하다는 변기도 사놓아보고 아이가 좋아하는 공룡이 그려진 팬티도 사보고 팬티 입는 아이가 나오는 동화책도 읽어주고 했으나 아이는 요지부동 절대 변기에 앉아볼 생각이 없고 터질 듯이 빵빵하게 기저귀를 적셔놓고도 갈아달라는 제스처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이쯤 되니 별수 없이 더 큰 기저귀가 없나 찾아보고 다녀야 한다. 검색해보니 키즈 기저귀라는 것이 있다는데.... 이름조차 우세스럽게 '키즈 기저귀'라서 선뜻 결제하진 못했고 지금 사놓은 기저귀가 다 떨어지기 전까진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을 가져보았다.


팬티가 싫다는 아이의 퉁퉁한 허벅다리에 간신히 기저귀를 잡아 뜯어 끼우다 보니 요즘 부쩍 병상에서 엄마와 기저귀로 씨름하던 것이 자주 생각났다. 엄마는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몇 사이클 거듭하며 조금씩 운신할 수 있는 범위가 좁아졌는데 처음엔 왼쪽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저리기 시작했고 그것이 왼쪽 팔의 마비로 퍼졌다가 그다음에는 오른쪽 발 그리고 언제부턴가는 사지를 꼼짝도 할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엄마는 그렇게 사지를 못쓰게 되고도 몇 개월을 더 살았는데 의학적으로 사지마비 진단이 내려진 것도 아니고 그저 조금씩 기능을 잃어간 것이라고 하니 언젠가는 다시 제기능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컸는지. 병실에서도 값비싼 프랑스제 바디워시로 샤워를 하고 밤이면 래디언스 크림인지 탄력 크림인지를 비롯해 오만 화장품을 일곱 겹이나 촘촘히 바르며 이 병에서 벗어날 날만을 기다렸지만 사실 우리 모두가 엄마에게 그런 날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엄마를 씻기고 돌보고 7가지의 화장품을 바르는 일은 고스란히 나의 몫이었는데 엄마의 체중이 점점 불어나고 나의 체중이 점점 줄어가면서부터는 쉬운 일이 정말 하나도 없었다. 암환자는 피골이 상접하도록 살이 빠진다는데 평생 56킬로를 유지했던 엄마는 어쩐 일인지 점점 무거워졌고 임종 때도 60킬로가 훌쩍 넘었다. 도저히 환자의 육중한 몸을 짊어지고 화장실 수발을 들 자신이 없어 병동 간호사들의 입을 빌려 이제는 정말 기저귀를 해야 할 것 같다고 어렵게 운을 떼어봤으나 밤마다 시슬리 화장품을 풀코스로 바르는 우아한 부인에게 기저귀를 차라니, 엄마는 절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따금씩은 환자복에 실수를 하기도 하고 밤에 병상에서 엄마를 짊어지고 내리다가 와장창 넘어져서 온 병동이 시끄럽기도 했지만 본인이 싫다는데 억지로 기저귀를 채울 수도 없는 일이라 정말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방광 근육이 약해져 너무 실수가 잦아지자 병동 수간호사는 더 이상은 감당이 안 되겠다며 엄마를 잘 어르고 달래 소변줄을 꽂았는데 소변 파우치를 바라보며 '이제 나는 끝이야...'라고 매우 낙심한 기색을 보이더니 이후로는 기저귀에 좀 체념하는 듯했다.


백혈병 진단을 받은 지 1년 만에 더 이상 도리가 없다며 의사는 모르핀을 잔뜩 처방해주며 우리를 집에 돌려보냈고 병원은 이제 임종 때만 모시고 가면 된다고 다음 외래를 잡아주지 않았다. 약에 취해 보내는 그 해 여름, 태풍 볼라벤이 창문을 때려 부술 듯이 불고 들어오는데 드디어 임종을 준비하러 병원에 가게 되었다. 응급실로 내원하니 약기운이 가셨는지 갑자기 기저귀를 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나도 정말 참을 만큼 참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죽어가는 사람에게 결국 모진 말을 하고야 말았고 얄궂게도 그것이 엄마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그 이후 엄마의 의식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막 신생아를 졸업한 둘째는 밤낮이 바뀐 것인지 밤이 이슥해질 무렵만 되면 사력을 다해 악을 쓰고 운다. 우리 부부는 악지르고 우는 것이 꼭 귀신이라도 한 마리 빠져나가는 것 같다며 이걸 악령 쇼라고 이름 붙였다. 며칠째 쪽잠을 자고 아기의 악령 쇼에 둥가 둥가 장단을 맞춰주느라 팔이 끊어질 것 같은데도 글쎄 날더러 힘드냐고 묻는다면 쉬이 힘들다는 말이 안 나오는 건 아마 그해 여름 혼이 빠져나가도록 힘들었던 기억 때문에 나는 필요 이상으로 고통에 내성이 생겨버린 모양이다. 그래서 아직까지 기꺼운 마음으로 두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며 차마 마지막의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했던 내 모습을 후회하는지도.


내년엔 정말 꽉 찬 네 살이라 제법 푸짐해진 궁둥이에 커다란 키즈 기저귀를 하기에도 너무 숭할 것 같으니 올해 안에는 아이에게 모진 소리를 해서라도 꼭 기저귀를 떼고야 말겠다고 다짐해보는데, 마음 깊은 곳에서는 또 그래, 네가 천년만년 기저귀를 할 것도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어 또 당장이라도 이걸 해결하려던 날 선 의지가 무뎌지는 걸 보니 어쩌면 우리 아이는 우세스럽게도 키즈형 기저귀를 오래도록 차야할지도 모르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