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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delaide Son Dec 24. 2021

첫 크리스마스를 맞는 자세

그렇게 우리는 부모가 된다

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다


큰아이는 19년 1월생이라 이미 두 번의 크리스마스를 보냈지만 기억에 남을 행사를 해주기엔 아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세 살에 맞는 이번 크리스마스가 아마도 아이에게는 크리스마스의 첫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8월에 태어난 둘째에게는 물론 그야말로 생애 첫 크리스마스이다.


말 느린 큰아이도 대충 눈치는 있어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파악했는지 이번 달 내내 어린이집 다녀와서는 엉터리 캐럴송을 부르기도 하고 산타 할아버지를 찾기도 했다. 아이의 노래는 대부분이 얼렁 뚱땅이라 잘 들어야 무슨 노래인지 알 수가 있을 지경.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 보는데 어느 날은 울면 안 된다는 가사가 설핏 들리기에 이때다 싶어, 그래! 울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안 주지! 그러니까 울면 안 되겠지! 산타 할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까? 라며 우격다짐식의 훈육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무엇이 받고 싶은지도 20번쯤 물어보았으나 대부분 동문서답으로 답했기 때문에 선물은 그냥 적당한 것으로 준비했다. 어린이집에서 가정방문 산타 행사를 해주시는 덕에 부모의 선물은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로 둔갑되어 아이가 좋아하는 뽀로로 포장지로 싸인 채 원에 보내졌다.


요즘 '또봇'이라는 만화에 심취해 있는 아이는 자꾸 로봇을 찾는다. 근사한 로봇을 하나 사줄까 하다가 휴직 중인 나의 얄팍한 지갑 사정을 고려하여 그 멋진 로봇의 작고 볼품없는 미니버전을 샀다. 5만 5천 원짜리 로봇과 7800원짜리 미니로봇의 효용가치의 차이에 대해 아마 분간할 길이 없으리라 믿고. 아마 빠르면 내년 즈음엔 더 크고 비싸고 좋은 것을 찾는 나이가 올 수도 있기 때문에 대충 때우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백청 한 항아리와 설탕 한 포대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아이가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없지는 않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벤자민 화분에 오너먼트를 걸어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곤 했는데 그때 작은 양말 주머니에 갖고 싶은 선물을 쪽지에 적어 넣어두면 엄마가 보고 참고하여 선물을 사는 방식이었다. (당시엔 엄마가 쪽지를 열어본다고는 상상하지 못했지만) 나는 여느 아이들이 그러하듯 강아지가 무진장 갖고 싶었고, 우리 집은 여느 집이 그렇듯 절대로 강아지를 키울 환경이 아니었으므로 나의 이 쪽지는 번번이 묵살되곤 했다. 그래서 산타할아버지는 지독히 합리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자꾸만 강아지를 써내는 일곱 살의 나에게 엄마는 자꾸만 색종이의 유용성에 대해 고집스레 늘어놓았고 어김없이 그 해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색종이 뭉치였다. 미취학 아동이었으나 색종이가 한 장에 얼마인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도 굳이 크리스마스의 마법을 빌지 않아도 언제나 필요하면 문방구에서 구할 수 있는 색종이를 선물로 받으니 마음이 어딘가 초라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실망한 티를 내지는 못했다. 어쩐지 그러면 안될 것 같았다. 산타가 준 선물을 고마워할 줄 모르는 나쁜 어린이가 될 것 같아서이다.


피천득 선생님의 '선물'이라는 수필을 읽어보면 나의 색종이 선물이 왜 비참한지 잘 알 수 있다. 백청 한 항아리는 선물이 되어도 설탕 한 포대는 선물이 될 수 없는 법. 혹여 좀처럼 구하기 힘든 금박 은박 색종이면 모를까 그저 재미없게 원색으로 구성된 흔하디 흔한 색종이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었던 부모의 무심함에 대해 부들부들 대며 남편에게 토로하고 있자니, 그는 그보다도 더 낭만이 없는 부모 밑에서 자랐는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곤 당최 받아본 적이 없다며 그 시절 색종이 선물에 뒤늦게 분개하는 나를 마치 복에 겨워 버릇 나빠진 아이 취급했다. 우리는 동갑내기에다가 같은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그 시절 비슷한 추억을 공유하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가정마다 성탄절을 보내는 방식에는 또 이렇게 차이가 있었나 보다.


크리스마스의 악몽


나는 일곱 살 겨울의 그 색종이 선물을 마지막으로, 여덟 살 겨울에는 산타 할아버지를 만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크리스마스 아침에 사실 산타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간 받아온 선물은 부모가 피땀 흘려 벌어온 돈이 가져다준 것이란 잔인한 현실을 황급하게 받아들이는 불상사를 겪고야 말았다.


아빠는 참으로 변변하지 못한 사내였는데 찢어지게 가난한 시골집에서 자란 데다가 4년제 대학을 나오고도 그럴듯한 회사(대기업)에 들어가질 못해(당신 주장에 의하면 키가 작아서라고 한다) 작은 사무실에서 매일 야근을 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월급이 자주 밀렸다. 이 고난하고 지난한 궁핍을 끊어내고자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그는 조그마한 사업을 시작했다. 용하다는 철학관에 가서 사명을 받아오고는 집에 와서 에이포 용지에 삼색 볼펜으로 이리저리 선과 원을 조합하더니 그럴싸한 로고 하나도 만들어냈다. 돼지머리를 사다 놓고 밤에 흥청망청 술을 마시며 고사를 지냈다. 우리 아빠가 말로만 듣던 사장님이 되는 좋은 날이었다. 회사 이름을 어떻게 지었냐고 묻는 몇몇의 질문에, 아빠는 철학관에서 받아왔다는 멋없는 답변 대신 미래로 더 나아가라고, 번창하라고 그리 지었답니다! 하며 배포 좋게 웃어 보였는데 그 모습이 생각해보니 참으로 젊었다. 아빠는 겨우 서른일곱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 색종이 뭉치였던 것도 아마도 사업 초창기라 모든 것이 빠듯하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여덟 살은 사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해이므로 산타할아버지 선물을 기다리기에는 조금 머리가 커버리긴 했지만 나는 지난해의 색종이 선물을 만회할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고대하며 1996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 아침 눈을 떴다. 주말에도 늦잠 자게 내버려 두는 일이 없던 엄마 아빠가 용케 이 시간까지 나를 깨우지 않았다고 생각할 만큼 해가 중천에 올라 있었다. 집안을 샅샅하게 뒤져 크리스마스 선물이 있을만한 곳을 찾았지만 선물은 없었고 한참 이 탐색전에 심취하다 보니 집이 수상하게 조용하다는 사실도 뒤늦게 발견했다. 그제야 부랴부랴 두 살 어린 남동생을 깨워 엄마 아빠가 사라진 이 심각한 상황을 알렸다. 의자를 딛고 올라가 거실 인터폰에 달린 전화기를 들어 떨리는 손으로 엄마가 알려준 비상연락망인 아빠 회사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주말 아침이라 회사에 나갔을 리는 없는데 그래도 달리 전화할 곳이 없어 신호음이 가는 것을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용케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산타할아버지가 우리 집을 잊으신 것 같다고, 늦잠을 잤기 때문인 것 같은데, 혹시 엄마가 대신 선물을 받아놓으셨냐고 속사포처럼 서러운 말을 쏟아내고 나니 수화기 너머에서 다 큰 애가 아직도 선물 타령을 한다는 타박이 돌아왔다. 아주 피곤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일곱 해를 지켜왔던 동심이 하염없이 스러졌다.


그렇게 우리는 부모가 된다


대학에 가서 어음수표법을 수강하고 나서야 부도어음이 무엇인지, 부도를 맞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그러기 전까지는 그저 부도는 나의 부모를 열 받게 하고 그래서 둘이 싸우게 하는 실체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 나는 종종 엄마가 집에 잘 들어오지 않거나 두 분의 싸움이 길어지면 "왜, 부도났어?"하고 조심스레 물었다가 된통 혼나곤 했다.


아마도 건설현장에 자재 납품을 하는 사업을 했던 아빠는 어쩌면 필연적으로 부도어음을 굉장히 많이 받았을 것이다. 아마도 갑작스레 맞은 부도를 어떻게든 수습하겠다고 휴일 아침부터 회사에 나가 사방팔방 뛰어다녀야 했을 것이고, 아마도 벤자민 나무에 걸린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열어볼 여유 따위는 갖지 못했을 것이다. 저녁 해가 다 져서야 두 분은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냉정하게 산타할아버지와 선물과 그 모든 것들이 잊혔다. 영문도 모른 채 갑갑한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했던 두 아이보다 밖에서 피가 마르는 고생을 하고 왔을 두 어른이 비로소 안쓰러워지는 걸 보니 나도 어느덧 부모가 다 되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색종이 선물을 주는 무심한 혹은 궁색한 부모는 되지 않아야겠다고 늘 되새겼는데도 어김없이 싸구려 로봇 장난감을 꼬깃꼬깃 포장하는 내 모습이 조금 울적했다. 선물이 작아 아이가 실망하면 어떡하냐는 뒤늦은 후회에 남편은 그러게 내가 큰 걸 사랬지 하고 입바른 소리를 해서 마음을 아프게 하는 대신 로봇이 작고 아담해서 손에 쏙 들어오니 더 좋아할 거라고 위로해주었다. 함께 꼬박 4년을 살고 나니 그도 생존하는 방법을 익힌 듯하다. 아내에게는 꼭 옳은 말만을 해야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하늘의 해도 달도 다 따다 주고 싶은 부모 마음이 이 작은 로봇에 전해지지 못할 것이 슬프던 찰나, 아직 총각인 남동생은 경제적으로도 여유롭거니와 생활의 혹독함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려 백화점에 가서 배짱 좋게 커다란 앰뷸런스 장난감을 사 왔다. 집에 경찰차도 있고 소방차도 있는데 앰뷸런스가 왜 없어? 라며 내밀어준 크고 묵직한 상자에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올해는 외삼촌의 지갑을 빌려 아이의 꿈과 환상을 지켜낸 것이었다. 아니 실은 나의 미흡한 부모 노릇을 보완한 셈이다. 내년 크리스마스 때는 변신시킬 때 철컹철컹 묵직한 소리를 내고, 가능하다면 합체도 하는 그런 대단한 로봇을 사주고 싶다. 아이가 오래도록 그날 아침의 충만함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나는 이러려고 부도 맞을 일이 추호도 없는 월급쟁이 직장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월급쟁이라서 푼푼이 떨어지는 돈을 다달이 헤아리느라 아이의 동심에 또다시 야박해지고야 마는 것을 보면 세상 부모는 모두 이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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