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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방통 Apr 17. 2020

첫 곡은 바흐, 인벤션 1번

요한 세바스찬 바흐, 인벤션 1번

안나 쿠브쉬노프의 인벤션 1번 연주. 네덜란드 바흐 소사이어티 복받으세요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첫 곡’을 가지고 있다. 피아노 앞에 앉으면 자연스레 처음 치게 되는 곡. 첫 곡은 이를테면 낯선 피아노에 건네는 인사말이다. 내 내면 가장 깊숙이 깃든 노래로 처음 만난 피아노를 파악하는 과정. 그 첫 곡이 누군가에게는 ‘엘리제를 위하여’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쇼팽의 녹턴이나 '고양이 왈츠'일 것이다. 아,  ‘River Flows in You’도 빼놓을 수 없다.


나의 출발점은 바흐의 <인벤션 1번>이다. 그것을 길 가다 무심코 들어선 피아노 학원에서 깨달았다. 아는 곡 있으면 아무거나 쳐보라는 피아노 선생님의 말씀에 어리둥절한 애인을 옆에 세워둔 채로 손끝에서 흐른 곡이 인벤션 1번이었다. 머리보다 손가락이 먼저 기억하는 곡.
바흐의 연습곡인 인벤션은 아마도 2성부로 이루어진(쉽게 말해 왼손과 오른손이 각자의 멜로디를 연주하는) 가장 쉬운 곡 중 하나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이 곡을 통해 바흐를 처음으로 만나보지 않았을까. 인벤션 1번 다장조는 15곡의 인벤션 중 첫 곡으로, 겨우 악보 두 쪽에 연주 시간도 1분 30초 남짓하다.
그래서 나는 피아노를 연습할 때 항상 첫 곡으로 인벤션 1번을 친다. 악보가 간결하니 부담 없이 근육의 긴장을 풀 수 있고, 양손을 번갈아 가며 연주하니 양 손가락을 균형 있게 움직여 줄 수도 있다. 인벤션 몇 곡을 치고 팔과 어깨가 따뜻해졌다는 느낌이 들면 그제야 그날의 주 연습곡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인벤션 1번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쉽게 드러낸다.* 손이 개나리꽃처럼 발그레한 초등학생도 조금만 연습하면 칠 수 있는 멜로디임에도, 그 아름다움은 결코 가볍지 않다. ‘도레미파레미도’로 시작되는 도입부는 단순한 만큼 강렬하고 잊을 수 없다. 이 멜로디를 왼손이 받아 따라 하기 시작하면 무궁무진한 다성음악의 세계가 열린다. 두 성부가 서로의 기둥과 버팀목이 되어주며 빈틈없이 견고한 구조를 쌓는다. 앞으로 만날 복잡하고 방대한 바흐의 음악을 예언이라도 하듯 말이다.
위대하지만 무겁지 않은 예술로 마음 깊숙이 스며들고, 그리하여 처음 만난 피아노 앞에서 그리 나쁘지 않은 첫 번째 인사가 될 수 있는 곡. 굳은 손으로도 아름다움을 만들 수 있다는 감각을 전달해주는 곡. 앞으로 더욱더 멋진 곡들을 연주해볼 수 있다고 격려해주는 곡. 물론 제대로 치려면 끝도 없겠지만, 쉽게 아름다울 수 있어서 인벤션 1번은 소중하다.

앞으로도 피아노를 치면서 인벤션 1번과 비슷한 작품을 더 찾아보려 한다. 실력도 연습 시간도 모자란 사람들이 익힐 수 있는 짧지만, 충분히 아름다운 곡들, 지루한 연습곡을 대체할 수 있는 곡들 말이다. 겨우겨우 짜낸 연습 시간에 하농을 친다면 그것 또한 슬픈 일 아닐까. 스카를라티도, 바르톡도, 이루마도, 류이치 사카모토도 좋으니, 다양한 음악을 듣고 연주하다 보면 잘 알려지지 않은 보석 같은 음악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첫 곡이 바뀔지도 모르지.

2020년 2월 17일.

* 사실, 세상에 ‘쉬운 곡’ 같은게 어디있겠는가? 이 이야기는 가능하면 나중에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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