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 굴드가 연주한 바그너
바그너,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전주곡 (피아노 편곡)
흰 배경의 스튜디오 안에서, 글렌 굴드가 말한다.
“최근에 벌인 재미있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피아노 적이지 않지만, 어떻게 보면 꽤 피아노 적이었습니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후기 작품 몇을 18세기, 아니 19세기 스타일을 벗어난 방식으로 편곡했죠. …들어볼래요?
(I’ve had a great deal of fun lately, doing something that is totally unpianistic in one sense, and I hope in another sense quite pianistic, and that is, I’ve been taking the, a few of the later pieces of Richard Wagner, and transcribing the for the piano, and not in the usual eighteenth century manner-ninteenth century rather, it was for the most of part they, literal and inexact; I’ve been very un-literal and un-inexact, and I like sound of it! Wanna hear some?)"
피아노 앞에 구부정한 자세로 앉은 그는 말의 여운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마이스터징어 전주곡의 위대한 C 화음을 친다. 특유의 흥얼거림과 함께.
피아노 음악 애호가에게 바그너는 그리 친숙한 작곡가는 아니다. 그가 영향력을 발휘한 장르는 거대하고도 거대한 악극 아니었던가(물론 2시간 반 분량의 피아노 음악을 남겼지만, 이는 그의 바이로이트 카논 중 하나의 분량에도 못 미친다). 그런데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그너의 작품은 피아노곡, 정확하게는 굴드가 피아노로 편곡한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의 전주곡이다.
‘마이스터징어’ 전주곡은 19세기 음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성적이다. 10분 사이 앞으로 3시간 50분 동안 펼쳐질 오페라의 다양한 모티프들이 여러 악기를 옮겨가며 반복된다. 나는 굴드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나서야 내가 이 곡을 휘파람으로 따라 부를 수 없던 이유를 깨달았다. 여러 겹으로 포개지는 멜로디가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내 입이 4개였으면 대위법적 휘파람이라도 흥얼거릴 수도 있었을 텐데.
전설로 남겨진 여러 바흐 연주에서 들을 수 있듯, 굴드는 음악의 다채로운 성부를 이해하고 연주하는 데 능숙했다. 그런 그의 장기가 바그너라는, 예상치 못한 영토에서 꽃핀다. 피아노에 기댄 브뤼노 몽생종 앞에서 굴드는 전주곡을 투명하게 연주한다. 오케스트라 연주를 덮고 있는 두터운 악기의 음색을 걷어낸, 전주곡이라는 건물의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는 편곡과 연주. 악보로도 보이지 않는 성부들이 하나하나 또렷이 들린다.
예를 들어, 영상 2분 10초의 주 멜로디와 상승 음계가 만나는 순간을 들어 보라. 피아노의 같은 위치를 치면서도 두 성부가 완전히 독립적으로 들린다. 음원으로만 들었다면 당연히 오버 더빙이라고 생각했을 테다. 혹은, 2분 33초에서 본인이 자랑스럽게 “이건 몰랐을걸요?”하고 외치며 연주하는, 십중팔구 모두가 놓쳤을 왼손 멜로디.
그는 피아노 연주를 숨어있는 여러 성부를 찾아내고 맞추는 일종의 게임으로 생각하는 건지도 모른다. 쇤베르크의 무조 음악에서도 12음 기법을 찾아내는 것을 취미로 삼았던 지적인 사람이니, 설득력이 있는 해석이다.
이런 감각으로 굴드는 가장 피아노 적이지 않은 곡을, 피아노로 멋지게 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내가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좋아하는 바그너 음악이 원곡이 아니라 피아노 편곡인 이유이다.
* 다큐멘터리에서는 굴드의 마이스터징어 연주가 중간에서 갑작스레 끊기지만, 다행스럽게도 전곡 녹음이 음반으로 나와 있다. 인터뷰집 <Conversation With Gould>에 따르면, 이 연주에서는 마지막의 3.5분이 오버 더빙으로 녹음되어 있다고 한다. 한 피아니스트를 신화화하려는 내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설명이다.
** 굴드의 피아노 편곡은 SCHOTT에서 악보로 판매 중이다. 궁금해서 샘플 페이지를 한번 봤는데, 으휴 말을 말자.
마이스터징어 전주곡 피아노 편곡 첫페이지. SCHOTT 홈페이지의 샘플을 가져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