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 안 챙겨 왔다..
방학을 시작했다. 휴가를 내고, 며칠 고향에 내려가있으려 했다. 오랜만에 부모님도 만나고, 글도 쓰고, 공부도 할 심산이었다. 말하자면 자발적 유배라고 할까. 내려가 읽을 책을 챙기고, 글을 쓸 노트북을 챙겼다. 아내는 아직 방학을 하지 않아서 나 홀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가장 걱정되는 건 짐 챙기기다. 꼼꼼하게 짐을 챙겨줄 아내가 오늘은 출근하고 없다. 오로지 나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 불안하다.
다행히 아내에게 카톡이 왔다.
<챙길 것>
1. 충전기
2. 안경
3. 렌즈통, 리뉴(거실화장실 거울장 안이나 화장대 밑 수납장 안에 있는 파우치에 들어 있을 것)
4. 속옷, 양말, 잠옷
5. 여벌 옷 1벌, 운동복
6. 노트북, 마우스
7. 스킨로션(필요하면), 립밤
완벽한 매뉴얼이다. 이대로만 하면 되겠다. 하나하나 체크하며 짐을 챙겼다. 완벽했다.
4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광주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밥을 먹었다. 찜닭, 치킨, 떡볶이, 튀김을 배 터지게 먹었다. 이게 바로 고향의 맛이지. 밥을 다 먹고 엄마와 함께 <나 혼자 산다>를 봤다. 엄마는 말했다.
"기안 84는 저렇게 요상한 행동만 하더라. 그런데 사람들이 왜 이렇게 좋아한대? 요즘 사람들은 진짜 이상하네. 너 기안 84 인도 여행 가는 것 봤냐? 인도에서 막 더러운 물에 막 뛰어 들어가 버리더구먼. 아! 그때 무슨 또 마사지를 한다고 누웠는데, 인도 사람들이 너도 나도 와서 한 번씩 뚜들기고 돈 달라고 하더라. 얼마나 웃기던지? 기안 84는 이름을 참 잘 지었어. '송도 90', '두암 88' 이런 건 안 어울리는데, '기안 84' 단어가 신기하게 서로 어울리잖아."
속으로 생각했다.
'엄마도 기안 84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나 혼자 산다>가 끝나고 방으로 왔다. 가장 먼저 노트북과 아이패드를 꺼냈다. 글을 읽을 아이패드. 글을 쓸 노트북. 이 먼 곳까지 유배를 온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런데... 노트북 충전기가 안 보인다. 가방을 아무리 뒤져도 없다. 아... 이러면 완전 나가린데... 집에 있는 아내에게 물어보니, 노트북 충전기는 그대로 콘센트에 꽂혀 있단다. 작은 충전기를 두고 온 탓에 인천에서 광주까지 들고 온 노트북은 쓸모없는 물건이 되어버렸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노트북의 배터리는 32%가 남았다. 2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고 나오지만, 경험상 1시간을 쓰면 바닥날 것이다.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노트북 충전기 없이 노트북 충전하는 법'을 찾진 못했다. 버스에서 내려오는 동안 고향에서 쓸 글을 구상했다. <아무튼 락밴드>의 다음 글을 얼른 써서 올려야 한다. 하지만 이젠 그럴 수 없다. 집에 돌아갈 날은 아직 이틀이나 남았는데..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이 글은 고향에서 쓰는 마지막 글이 될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다. 돌아갈 그날까진 휴대폰으로 쓰거나, 연필로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