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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잉넛과 노래 부른다면 한겨울에도 꽃이 필 거야

크라잉넛

by 비둘기

“너넨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냐?”

전설적인 홍대의 라이브 클럽 <드럭>의 주인아저씨. 이석문 사장이 그들에게 던진 첫마디다.

“저희 록 하는데요?”

어이가 없어 웃었지만, 그는 생각했다.

‘저것들 봐라. 뭘 좀 아는 녀석들이네?’



며칠 뒤, 이 소년들은 <드럭>에 오디션을 보러 온다. 이제 손님이 아닌 밴드가 되고자 한다. 드럭 아저씨는 그들을 바라본다. 이상하다. 한 놈은 드럼 앞에 앉고, 나머지 세 놈은 모두 기타를 메고 있다. 보컬이 누구냐고 물으니 없단다. 드럭 아저씨는 다시 한번 말한다.

“너넨 진짜 뭐 하는 놈들이냐? 이렇게 오디션을 본다고?”

소년들은 대답한다.

“오디션 잘해야 되는 거예요?”

대책 없는 소년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이 자식들이 펑크록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구나.’

말도 안 되는 공연이었지만, 그는 소년들을 합격시킨다.

크라잉넛이 탄생한 전설적인 날이었다.




근본 없는 밴드의 등장에 평론가들과 마니아들은 한두 마디씩 끼어들었다. 너희가 펑크야? 펑크는 이러면 안 돼. 너희는 가짜야. 영국 펑크 좀 더 듣고 공부해! 크라잉넛은 대답 대신 ‘말 달리자’라는 곡을 발표한다. 그래. 나 펑크 아니다. 그러니까. 제발 ‘닥쳐! 닥쳐! 닥쳐! 닥치고 가만있어’.


'말 달리자'를 통해 크라잉넛은 조금씩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말 달리자'를 외쳤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크라잉넛의 노래는 집에서 들을 수 없었다. 거리에서 들을 수 없었다. 라디오에서 들을 수 없었다. 오직 홍대 공연장에서만 들을 수 있었다. 음원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드럭 아저씨는 결심한다. 자신의 전세금을 털어 크라잉넛의 앨범을 내기로. 크라잉넛의 첫 앨범 <Our nation>은 드럭 아저씨의 피 같은 돈으로 세상에 나왔다. 덕분에 홍대 어딜 가든 크라잉넛의 ‘말 달리자’가 나왔다.



나는 TV 드라마에서 처음 말 달리자를 들었다. 주인공들끼리 노래방을 간 장면이었다. 그들은 크라잉넛의 '말 달리자'를 부르며 스트레스를 날렸다. '닥쳐!'라는 두 글자가 내겐 충격이었다. 주인공 모두가 목이 터져라 '말 달리자'를 외쳤다. 동물 같은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진짜 웃긴 노래가 다 있네.' 인터넷에 '말 달리자'를 검색했다. 이 곡을 부른 진짜 가수 크라잉넛의 영상이 나왔다. 드라마에서 처음 들었을 때보다 10배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 미친 사람처럼 점프하고, 서로 부딪히고, 기타를 던지고, 드럼 위로 다이빙하고. 가관이었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끌렸다. 보고 또 봤다. 가사가 저절로 외워졌다.


노래하면 잊혀지나, 사랑하면 사랑받나

돈 많으면 성공하나, 차 있으면 빨리 가지 닥쳐!




서서히 내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던 그들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다시 나타났다. 교실이었다.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를 배우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크라잉넛의 <룩셈부르크>라는 곡을 들려주셨다.


이 노래는 승무원의 안내 멘트로 시작한다.


기내에 계신 승객 여러분

안전벨트를 착용하여 주십시오.

이 비행기의 도착 예정지는

룩.

갑작스레 방송에 이상이 생긴다.

아아. 룩.

그때 크라잉넛이 등장한다.

룩 룩 룩셈부르크, 아 아 아리헨티나.


선생님께서 이 노래를 틀어주신 이유가 있었다. 이 곡은 음악적 가치만큼 교육적 가치도 훌륭했다. 6학년 학생들이 절로 세계지도를 펼치게 했다. 노래를 따라 불렀을 뿐인데, 각 나라의 중요한 특징이 저절로 외워졌다.

석유가 넘쳐나는 사우디

이거 사람이 너무 많은 차이나

월드컵 2연패 브라질

전쟁을 많이 하는 아메리카

하루종일 레게 하네 자메이카

하루 왠종일 해 떠 있는 스웨덴

신혼여행 많이 가는 몰디브 섬

이제 곧 하나가 될 코리아.



세계 문화 말고도 많은 것을 배웠다. ‘연패(連霸)’와 ‘연패(連敗)’를 구분할 수 있는 언어적 소양. 레게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음악적 소양. 하루 왠종일 해 떠 있다는 말을 의심하고 네이버 지식인을 통해 팩트 체크하는 과학적 소양까지. 룩셈부르크는 통합적 인재를 길러주는 노래였다.



선생님께서 틀어주신 ‘룩셈부르크’를 들은 아이는 크라잉넛의 팬이 된다. 왠지 모르게 반항하고 싶던 사춘기 시절. 나는 방에서 이어폰을 끼고 크라잉넛 노래를 들었다. ‘닥쳐!’로 시작한 귀여운 반항은 <지독한 노래>를 들으며 세상에 대한 분노로 커졌다.


세상이 다 그렇지 말 못하면 쪽박 차지

힘만 세도 출세만 하지

개그맨이 되기 전에 살을 빼고

얼굴 깎고 아이돌이 되어나 보자

개새끼! 소새끼! 말새끼! 씨발새끼!

웃기지도 않는다고라

입 찢어서 귀에 걸어줄까 허파를 뚫어줄까

입 닥치고 한판 붙자

<지독한 노래>


중2병에 걸린 소년은 급기야 죽음을 생각한다.


외로운 기러기

갈매기 모기 토끼

소년 소녀 들아

모두 추락해서 지구를 박살 내자

나는 거짓말쟁이

너도 거짓말쟁이

우린 지금 모두 여기 다 죽자

<다 죽자>


중2병 말기 환자. 방구석 찐따. 쟤는 도대체 커서 뭐가 되려나?


믿기 어렵겠지만, 무럭무럭 자라서 선생님이 되었다. 스승의 가르침을 이어받아서 아이들에게 크라잉넛의 ‘룩셈부르크’를 틀어준다. 세계 문화를 가르칠 땐 이게 최고다. 사춘기가 찾아온 아이들을 보면 생각한다. ‘도대체 왜 그럴까?’. 내 과거를 떠올리며 생각을 바꾼다.

‘그래도 나보단 훨씬 낫네.’



‘운 좋게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했고, 신혼여행으로 몰디브 섬을 갔다. ‘코리아’가 ‘이제 곧 하나가 될’ 것이란 말은 더 이상 믿지 않지만, 언젠가 하나가 되길 바란다. 여전히 크라잉넛을 좋아하고, 그들을 보러 공연장과 페스티벌을 기웃거린다. 올해 크라잉넛은 데뷔 30주년을 맞았다. 30년 묻고 따블로 2055년까지 함께 합시다.


오늘 밤은 아주 특별한 밤.

여러분과 함께 하는 밤.

크라잉넛과 노래 부른다면

한 겨울에도 꽃이 필 거야.


<비둘기 추천 크라잉넛 플레이 리스트>

1. 말 달리자

2. 룩셈부르크

3. 다 죽자

4. 명동콜링

5. 운 좋게도

6. 밤이 깊었네

7. 좋지 아니한가

8. 서커스 매직 유랑단

9. 순이 우주로

10. 뜨거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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