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승부>를 보고
내가 어렸을 땐 바둑이 꽤 인기 있었다. 어느 집에 가도 바둑판이 있었다. 매일 아침 집으로 배달되는 신문엔 꼭 바둑 기보가 올라왔다. 옆엔 간략히 어떤 수가 승부를 갈랐는지 쓰여있었다. TV에서 하는 바둑 방송을 나는 좋아했다. 바둑을 둘 줄 모르는데도 그냥 봤다. 나는 승부를 겨루는 기사들보다 해설자를 좋아했다. 벽에 붙은 큰 바둑판에 자석으로 된 바둑돌을 이리저리 붙이며 승부를 예측하는 모습이 재밌었다. 우리 집에도 저런 자석 바둑판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로 바둑>, <한게임 바둑> 등 온라인 바둑 게임도 생겨났다. 아빠는 가끔 온라인 바둑을 두었다. 그땐 바둑을 두는 것이 어른의 상징처럼 보였다. 드라마에서도 늘 바둑두는 장면이 나왔다.
나도 바둑을 배웠다. 처음엔 아빠에게 배우다가 바둑 학원까지 가게 되었다. 내가 바둑을 좋아했는지, 그냥 놀거리는 많지 않고, 남는 게 시간이어서 배웠던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래도 혼자서 기보를 보고 따라두었던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억지로 배우진 않았던 것 같다. 그때 가장 유명했던 스타는 이창호 9단과 조훈현 9단이었다. 바둑을 까맣게 잊은 지금도 그들 이름은 기억이 난다. 조훈현 9단은 늙었고, 이창호 9단은 젊었다. 두 선수가 사제 간이라는 걸 안건 얼마 전이다.
오늘 이 두 바둑 스타의 이야기를 담은 <승부>를 봤다.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라섰던 조훈현. 그는 ‘바둑의 신이 온다고 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압도적인 실력자였다. 그 앞에 어린 바둑 신동 이창호가 나타난다. 이창호의 재능과 승부욕을 높게 산 조훈현은 그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전주 출신 이창호를 본인 집에 데려와 가르친다. 재능있는 제자를 혹독한 훈련을 통해 성장 시키는 이야기. 그리고 결국엔 스승을 넘어서는 이야기. <타짜>의 평경장과 고니, <취권>의 소걸아와 황비홍. <위플래쉬>의 플레처와 앤드류.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플랭키와 매기. 분야에 상관없이 볼 수 있는 흔한 스토리다.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를 키우는 것은 스승으로서 가장 보람된 일이다. 모든 스승의 목표이기도 하다. 하지만 <승부>는 바둑만이 가진 독특한 특징을 부각한다. 바로 스승과 제자가 동등한 선수로서 대결을 펼치는 것이다. 이런 스포츠는 많지 않다. 대부분 선수를 은퇴하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다. 최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스승 조훈현. ‘바둑의 신’이 와도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그에게 유일한 적수는 그의 제자 이창호였다.
그때 조훈현 기사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이창호를 가르친 걸 후회했을까? 세계 최고가 되고도 마음껏 기뻐할 수 없는 이창호 기사의 마음은 어땠을까? 스승을 뛰어넘은 순간.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이병헌, 유아인 두 배우는 그날의 긴장감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전쟁만큼이나 비정하고 냉혹한 바둑의 세계. 그 속에서 외롭게 싸우던 두 기사의 모습. 어렸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보았던 바둑 중계가 이제는 달리 보인다.